왜 세계 최고의 AI 기업들은 모두 대만을 향하는가?
TSMC, 에이서, 폭스콘, 콴타, 위스트론, 미디어텍…
AI 시대를 움직이는 대만 기업들의 성공 비밀
오랫동안 한국 사회는 대만을 ‘비슷한 길을 걸어온 경쟁국’ 정도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AI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세계 산업의 지형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현재 세계 AI 산업은 대만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엔비디아를 비롯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대만의 반도체 제조와 첨단 패키징 기술에 의존하고 있으며, AI 서버 대부분을 대만 기업들이 생산하고 있다. 반도체, 서버, 부품, 물류가 하나의 공급망으로 연결되면서 대만은 명실상부한 ‘세계 반도체 기술의 심장’이 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변화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AI 열풍은 단지 결정적인 계기였을 뿐, 대만은 60여 년에 걸쳐 기술력과 산업 생태계를 꾸준히 축적해왔다.
공학박사이자 산업정책 전문가로 주타이베이 한국 대표를 지낸 이은호 저자는 기존 출간된 책과는 다른 시각에서 대만을 깊이 있게 조망한다. TSMC의 모리스 창, 에이서의 회장 스전룽 등 대만 반도체·IT 산업을 이끈 거물들을 직접 만나 나눈 대화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대만이 어떻게 ‘세계 반도체 산업의 심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저자는 대만의 현재를 통해 한국 산업의 미래를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만의 성공을 부러워하는 일이 아니라, 그 성공을 가능하게 만든 사회구조와 경쟁력을 이해하는 일이다.
대만의 경쟁력은 TSMC가 아니라, 수백 개 기업이 연결된 생태계다!
TSMC 신화 뒤에 숨겨진 대만의 60년 성공 전략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은 ‘남이 설계한 칩만 만들겠다’는 발상에서 시작됐다_TSMC
-어머니의 평생 저축으로 에이서를 창업한 스전룽_‘스마일 커브’ 전략으로 아시아 기업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다
-‘세계의 공장’에서 AI 서버와 전기차 플랫폼 기업으로 변신한 폭스콘
-노트북 제조업체에서 세계 AI 서버 시장의 강자로 도약한 콴타, 위스트론
-‘왜 창업해?’가 아니라 ‘왜 아직도 창업하지 않았어?’_창업이 취업보다 자연스러운 문화
-60여 년간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림 없이 이어진 국가 전략
-해외 인재와 화교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개방성
많은 사람이 대만의 경쟁력을 TSMC라는 한 기업에서 찾는다. 그러나 저자는 TSMC의 성공을 한 기업의 신화로만 해석하지 않는다. 세계 최고의 제조기업도 홀로 성장할 수는 없었다. 오늘날의 대만은 60여 년에 걸쳐 일관되게 추진된 국가 전략과 전문가를 존중하는 사회문화, 창업을 장려하는 제도, 그리고 정부·기업·대학이 함께 구축한 산업 생태계가 만들어낸 결과다.
실제로 대만은 1960년대부터 기술 중심 국가를 목표로 장기적인 산업 전략을 추진해왔다. 정부는 연구기관과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대학은 산업을 이끌 인재를 길렀으며, 기업들은 경쟁과 협력을 바탕으로 촘촘한 공급망을 구축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산업정책의 큰 방향은 흔들리지 않았고, 실패한 기업인의 경험은 다음 창업의 밑거름이 되었다. 국가와 기업, 대학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긴밀하게 연결된 생태계가 있었기에 TSMC 역시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산업 생태계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세계적인 기업을 일군 창업자들의 선택과 결정적 순간에 주목한다. TSMC의 모리스 창, 에이서의 스전룽, 폭스콘의 궈타이밍을 비롯해 세계 AI 서버 시장의 강자로 도약한 콴타와 위스트론의 성장 과정을 현지 취재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풀어낸다. 어머니의 평생 저축으로 창업하고, 갈라 디너에서 맺은 인연이 공동 창업으로 이어지며, 한 번의 실패를 다음 도전의 자산으로 삼는 이야기는 숫자와 재무 성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대만 기업 생태계의 힘을 보여준다.
”한국 기업은 대만 사례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실리콘 아일랜드를 만든 다섯 가지 문화
TSMC의 모리스 창, 에이서의 스전룽, 폭스콘의 궈타이밍 등 세계적인 기업을 일군 인물들은 어떻게 창업했고, 어떤 선택으로 위기를 돌파했을까? 저자는 이들의 삶과 경영 철학을 따라가며 대만 기업의 경쟁력이 뛰어난 기술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세계 시장이 바뀔 때마다 기존의 성공 방식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산업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유연성이야말로 대만 기업의 또 다른 힘이었다. 노트북과 PC를 만들던 기업들은 AI 서버 기업으로 변신했고, 부품 기업들은 AI 공급망의 핵심 기업으로 성장했다. 변화의 속도 자체보다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 더 중요한 경쟁력이 된 것이다.
이러한 경쟁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저자는 대만 기업을 성장시킨 사회문화적 기반을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리궈딩과 쑨윈쉬안 같은 전문가를 존중하고 그들의 성취와 경험을 사회적 자산으로 계승하는 문화다. 둘째, 화교를 비롯한 해외 네트워크와 디아스포라를 전략적 자산으로 활용하는 개방성이다. 셋째, 정부·학계·산업계가 긴밀하게 협력해 혁신을 촉진하는 제도적 기반이다. 넷째, 실패를 교훈 삼아 과감하게 제도를 개혁하는 실용적 태도다. 다섯째,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도록 창업을 장려하는 사회적 분위기다. 기술은 기업이 만들지만, 그 기업을 성장시키는 토양은 결국 사회와 문화가 만든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메시지다.
이 같은 문화는 기업 간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대만 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공급망 안에서는 긴밀하게 협력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제조기업과 설계기업이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며 함께 성장하는 산업 생태계를 구축했고, 산업 생태계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결국 개별 기업의 경쟁력으로 돌아온다는 인식도 자리 잡았다. 정부 역시 산업 인프라에 대한 과감한 지원, 금융 경쟁력 강화, 상속세·증여세 제도 개편, 이주 노동자의 생활 환경 개선, 정년 연장 등 인력난에 대응하는 실용적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직장인의 돌봄 부담을 덜어주는 외국인 재택 간병인 제도를 도입해 기업 성장을 뒷받침했다.
저자는 이러한 대만의 경험이 한국 사회에도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고 말한다. 한국 기업 역시 개별 기업의 성과를 넘어 공급망 전체를 바라보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AI 시대에는 메모리, 파운드리, 소프트웨어, 패키징, 서버, 전력, 데이터센터에 이르는 산업의 각 축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 거대한 공급망을 얼마나 촘촘하고 유연하게 구축하느냐가 기업을 넘어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한다. 이제 경쟁의 단위는 하나의 기업이 아니라 생태계다. 그리고 그 생태계 안에서의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다. 이것이 60년에 걸쳐 ‘실리콘 아일랜드’를 만들어낸 대만의 경험이 한국 기업에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다.
”기술 패권 시대, 한국 반도체 산업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반도체·AI·창업으로 읽는 대만의 성공 공식
이 책은 대만의 성공을 단순히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대만 반도체 산업의 성공 전략을 통해 AI 시대에 한국 반도체 기업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묻는다. 저자는 AI 시대에도 과거의 성공 공식을 반복해서는 새로운 경쟁력을 만들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반도체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만, AI 산업은 메모리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첨단 패키징과 파운드리, AI 인재, 소프트웨어, 데이터센터, 에너지 인프라가 함께 성장해야 한다. 특히 저자는 한국이 메모리 강점을 기반으로 파운드리와 첨단 제조 역량을 결합하는 ‘하이브리드 파운드리 전략’을 고민해야 하며, 글로벌 기업과의 협력 속에서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과 제도다. 전문가를 존중하는 문화, 실패를 다시 도전으로 연결하는 창업 환경,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산업 전략이 뒷받침되어야 세계 기술 경쟁에서 지속적인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저자는 대만의 경험을 통해 한국이 추격자가 아니라 미래 산업 질서를 설계하는 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조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재미는 각 장 말미에 수록된 ‘세계를 움직인 대만 부호들’ 코너다. 산업과 기술을 거시적으로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만을 대표하는 부호들의 삶, 결정적 선택, 경영 철학을 소개한다. 산업의 역사와 기업가들의 인간적인 이야기가 어우러져, 기술과 산업을 한층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AI 시대에는 한 기업의 경쟁력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의 경쟁력이 중요하다. 이 책은 대만의 사례를 통해 ‘세계 1위 기업을 만드는 것’보다 ‘세계 1위 기업이 계속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국가 경쟁력임을 알려준다. 기술과 산업을 넘어, 국가 경쟁력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고민하는 우리 사회에 깊은 통찰을 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