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한 자리에서 사람의 일생을 다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겠지요? 그런데, 소리꾼은 합니다. 소리꾼이 한자리에서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부르는 것을 ‘완창’이라고 해요. 예를 들어,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판소리 〈춘향가〉는 ‘사랑-이별-고난-재회’로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는데요. 이 이야기를 책으로 엮으면 한 권의 소설이 되지요.(p16)
춘향은 자신의 집 대문 앞에 엎드린 채로 떠나가는 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한모롱이 돌아들어 나무만큼 보이다가, 두 모롱이를 돌아들어 별만큼 보이다가, 십오야 둥근 달이 떼 구름 속에 가 들겄구나.”
아! 정말 멋진 표현이지요? 시야에서 조금씩 멀어져 가면서 더욱 작아지는 임의 모습이 “나무만큼 보이다가”, “별만큼 보이다가” 결국 둥근 달이 구름 속에 가려진 것처럼 영영 보이지 않게 되었네요. 영영 이별입니다.
(p49)
와우! 수없이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부어내고’ 이렇듯 수없이 돈을 퍼내도 다시 돌아보면 ‘도로 하나 가득’ 차오르는 마법의 상자가 있다니 정말 좋아서 기절할 노릇이네요. 흥보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얼마나 많은 쌀과 돈을 부어냈던지 쌀이 10만 석, 돈이 10만 냥이었다고 합니다.
흥보는 벌써 돈에 취해버렸네요.
(p93)
판소리 〈적벽가〉 중 「군사설움타령」은 『삼국지연의』에는 등장하지 않는 판소리에서 창작한 독창적 대목입니다. 오직 〈적벽가〉에서만 들을 수 있는 특별한 장면으로, 적벽대전을 하루 앞두고 조조 진영의 병사들이 저마다 설움을 토로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대목은 병사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풀어낸 서정적인 장면으로, 창본과 유파에 따라 구성은 다르지만 대체로 〈부모 생각〉, 〈자식 생각〉, 〈아내 생각〉, 〈위국자 불고가〉 등이 공통적인 대목입니다.(p189)
혹시 “이름이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들은 것 같기도 하다고요? 그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구절은요? 네, 바로 김춘수 시인의 「꽃」의 일부입니다. 이름은 한 사람의 ‘존재를 나타내는 기호’이자, 사회적 관계를 맺는 중요한 매개이기도 합니다. ‘이름값 한다’라는 표현도 이런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겠지요. 갑자기 이름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소리꾼 이자람을 소개하려니 그 이름이 새삼 뜻깊게 느껴져서입니다.
(p263)
소리꾼 한승석이 쏟아내는 맛깔난 판소리 성음에 기타와 피아노, 장구 장단 등이 어울려 새로운 하모니를 만들어내지요. 이게 판소리 맞아?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Ty6TzEwPR8
이러한 시도는 판소리의 경계를 확장하는 작업인데요. 이 음악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반주가 바뀌었다고 판소리가 아닌 게 아닙니다. 내가 부르는 소리가 판소리 어법을 따르고 있다면, 그것은 판소리입니다.” 적어도 연주 방식에 있어서는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다는 것이죠. 한승석은 창작 판소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창작 판소리는 기존 전통 판소리의 형식을 따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판소리의 본질을 잃지 않는다면, 형식은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다.” 한승석은 창작 판소리를 고정된 틀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전통 판소리의 음악 어법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며 확장하는 것이 창작 판소리의 핵심이라고 보고 있습니다.(p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