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대문호’ 체호프의 정수
생의 고단함을 끌어안는 통찰과 위트
체호프가 남긴 희곡, 단편소설, 편지 등에서 선별한 문장들을 엮은 책 『체호프의 문장들』이 출간되었다. 『예술 수업』 『예술적 상상력』을 쓰고 체호프의 『아내·세 자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등을 번역한 오종우 교수가 체호프의 문장들을 고르고 옮겼다.
2024년은 체호프의 타계 120주기이다. 체호프는 세상을 떠난 지 1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재적인 작가다. 그의 희곡은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무대 위에 오르고 있고, 그가 남긴 단편소설은 레이먼드 카버, 앨리스 먼로, 윌리엄 트레버 같은 소설가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체호프의 문장들』은 세월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 체호프의 정수를 그려낸다.
작가이자 의사였던 체호프는 환자의 질병을 진단하듯 생의 필연적인 고통을 포착했다. 그의 문장이 절개해서 드러낸 세계에는 살아 있기에 피할 수 없는 아픔이 가득하다. 사랑은 식어가고, 대화는 어긋나고, 세계는 침잠한다. 그러나 체호프는 인간을 향한 따스한 시선과 유머로 불가피한 인생의 상처들을 꿰맨다. 『체호프의 문장들』은 고단한 삶을 회피하지 않고 온전히 끌어안는 마음을 건넨다.
오종우 교수가 책의 서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풍요와 성장을 외치는 최첨단 과학기술 시대”에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영혼의 무게는 한없이 가벼워지고 있다. 『체호프의 문장들』은 체호프가 남긴 작품들과 체호프라는 또 하나의 텍스트를 통해서 유일무이한 영혼의 가치를 복원한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을 복제해도,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인공지능을 개발해도 영혼은 만들 수 없다. 영혼은 설명할 수 없어 논리를 세울 수도 없고 분석할 수도 없으니 조립할 수도 없다. 하지만 체호프는 영혼을 “당나귀나 파충류와 인류를 구별시켜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풍요와 성장을 외치는 최첨단 과학기술 시대에 인간의 영혼을 보는 자연과학도 작가 체호프가 우리에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들어가며」에서
견디면서 삶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
체호프의 희곡작품 속 명대사
『체호프의 문장들』에는 체호프의 희곡작품 속 명대사가 실려 있다. 서로 다른 작품의 대사들을 나란히 읽다 보면, 삶을 대하는 체호프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체호프의 작품에는 처절하게 고민하고, 좌절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체호프는 가난한 잡화상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모스크바 의과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글을 써야 했다. 스물네 살부터 앓은 폐결핵은 평생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는 생의 피로를 겪어봤기에 인물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배우가 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온 『갈매기』의 니나는 “중요한 것은 꿈꿨던 빛나는 명예가 아니라 견뎌내는 능력이에요”라고 말한다. 이뤄지지 못한 사랑과 풍비박산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바냐 아저씨』의 소냐는 이렇게 말한다. “운명이 우리에게 주는 시련들을 참아내요. 지금도, 늙은 후에도, 쉬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요.” 모스크바에 돌아가기를 꿈꿨지만 그러지 못한 『세 자매』의 올가는 마지막 대사를 통해 말한다. “오, 사랑하는 내 동생들,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살아가야 해!” 체호프는 삶이 늘 견딤을 요구하는 괴로운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만일 내가 나를 위해 반지를 산다면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것을 고를 것이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은 없으며, 우리가 내딛는 아주 작은 발걸음 하나하나가 현재와 미래의 삶에 중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견뎌온 일들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체호프의 문장들』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고유한 이야기
위대한 예술가 체호프의 창작론
체호프는 셰익스피어와 함께 가장 사랑받는 극작가이자 현대 단편소설의 체계를 정립한 예술가다. 『체호프의 문장들』은 체호프가 남긴 작품과 그가 쓴 편지 등을 통해서 그의 예술 철학을 소개한다.
체호프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은 주로 평민이고, 부유하지 않으며, 일상의 작은 번민에 시달린다. 레이먼드 카버는 체호프가 “바닥으로 가라앉은 사람들에 대해 썼다”라고 말한 바 있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선택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체호프는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시베리아를 거쳐 사할린섬까지 가서 3개월간 머물며 유형지에 갇힌 죄수들의 보건·의료 실태를 조사했다. 작가로 성공한 뒤에도 의사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방역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농촌 학교와 공공도서관 설립에도 기여했다. 체호프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토대로 세상의 조명을 받지 못하던 사람들을 무대 위에 올려서 그들이 스스로 말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체호프는 정치가가 아닌 예술가였다. 그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작품을 창작하지 않았다. 다만 실제로 존재할 것 같은 인물을 공들여서 창조하고, 그 인물이 살아가는 사회를 그려내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독자에게 질문을 건넸을 뿐이다. 체호프가 남겨둔 여백 덕분에 그의 작품은 시대를 막론하고 늘 유효하다.
예술가는 작품의 인물들과 그들이 말하는 내용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며, 단지 공정한 목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 나의 유일한 관심은 중요한 말과 중요하지 않은 말을 구별하면서 인물을 조명하고, 그들의 언어로 말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체호프의 문장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