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30(1678) 송정백(宋定伯)
남양(南陽) 사람 송정백이 젊었을 때 밤길을 가다가 귀신을 만났다. 송정백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귀신이 말했다.
“나는 귀신이오.”
귀신이 물었다.
“그대는 또 뉘시오?”
송정백이 귀신을 속여 말했다.
“나도 귀신이오.”
귀신이 물었다.
“어디로 가려 하시오?”
송정백이 대답했다.
“완시(宛市)로 가려 하오.”
귀신이 말했다.
“나도 완시로 가려 하오.”
그리하여 함께 몇 리를 가다가 귀신이 말했다.
“걸음걸이가 너무 느리니 서로 번갈아 업어 주기로 하면 어떻겠소?”
송정백이 말했다.
“그거 좋소!”
귀신이 먼저 송정백을 업고 몇 리를 갔는데 귀신이 말했다.
“그대는 너무 무거우니 귀신이 아닌 것 같소.”
송정백이 말했다.
“나는 신참 귀신이기 때문에 몸이 무거울 뿐이오.”
이번에는 송정백이 귀신을 업었는데 귀신은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두세 차례 번갈아 업어 주었다. 송정백이 다시 말했다.
“나는 신참 귀신인지라 귀신이 꺼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오.”
귀신이 대답했다.
“오직 사람의 침을 좋아하지 않소.” 미 : 지금 습속에 꺼리는 것을 보면 바로 침을 뱉는 데에는 그 유래가 있다.
그리하여 함께 가다가 도중에 물을 만났는데, 송정백은 귀신에게 건너가라고 한 뒤 들어 보았더니 물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송정백이 스스로 물을 건너갔는데 귀신이 다시 말했다.
“그대는 어째서 소리가 나는 것이오?”
송정백이 말했다.
“갓 죽어서 물을 건너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소.”
장차 완시에 도착할 즈음에 송정백은 곧바로 귀신을 들어 올려 어깨 위에 놓고 꽉 붙잡았다. 귀신이 크게 소리치며 꽥꽥 소리를 내면서 내려 달라고 요구했으나 송정백은 들어주지 않았다. 송정백이 곧장 완시로 가서 귀신을 땅에 내려놓았더니 한 마리 양으로 변하자, 바로 그것을 팔았으며 또 그것이 변신할까 걱정해 침을 뱉었다. 그러고는 돈 1500냥을 받고 떠났다. 미 : 송정백은 속임수가 심했지만 또한 다행히도 어리석은 귀신을 만났다. 당시에 이런 말이 있었다.
“정백이 귀신을 팔아 1500냥을 벌었다네.”
59-4(1735) 담생(談生)
담생은 마흔 살이 되도록 부인이 없었는데, 늘 책을 읽으며 감격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밤중에 나이가 열대여섯 살쯤 되고 용모와 차림새가 천하에 둘도 없는 여자가 담생을 찾아와 부부가 되겠다고 하면서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니 불로 나를 비춰 보지 마세요. 3년 후에는 비춰 보아도 됩니다.”
이들은 부부가 되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들이 이미 두 살이 되었을 때 담생은 참을 수 없어서 밤에 부인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불로 비추어 보았더니, 부인의 허리 위로는 사람처럼 살이 돋아나 있었으나 허리 아래로는 단지 마른 뼈만 있을 뿐이었다. 부인이 이를 알아차리고서 말했다.
“당신은 나를 저버렸군요. 나는 거의 살아나려고 했는데, 어찌하여 1년을 더 참지 못하고 결국 비춰 보았습니까?”
담생이 사과했지만 부인은 울면서 눈물을 멈추지 못하며 말했다.
“당신과 부부의 인연은 비록 영원히 끝났지만 내 아들이 염려됩니다. 만약 당신이 가난하면 혼자 힘으로 아들과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니, 잠시 나를 따라오면 당신에게 물건을 하나 주겠습니다.”
담생은 부인을 따라가서 화려한 집으로 들어갔는데, 집이며 기물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부인은 진주로 된 장삼 한 벌을 담생에게 주며 말했다.
“이것이면 먹고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담생의 옷자락을 찢어서 잘 보관한 다음 담생을 떠나보냈다. 그 후에 담생은 장삼을 가지고 시장으로 갔는데, 휴양왕(睢陽王)의 집에서 그것을 사서 담생은 천만 전을 벌었다. 휴양왕이 그 옷을 알아보고 말했다.
“이것은 내 딸의 장삼이니 틀림없이 무덤을 도굴했을 것이다.”
휴양왕은 곧 담생을 잡아 와 심문했다. 미 : 〈모란정도타장원극(牡丹亭刀打狀元劇)〉은 이 고사를 바탕으로 했다. 담생은 사실대로 자세히 아뢰었으나 휴양왕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딸의 무덤을 살펴보았는데 무덤은 예전처럼 완전한 상태였다. 딸의 무덤을 파고 보았더니 과연 관 뚜껑 밑에서 담생의 옷자락이 나왔다. 휴양왕이 담생의 아들을 불러와 보았더니 딸을 빼닮았기에 휴양왕은 그제야 담생의 말을 믿게 되었다. 휴양왕은 즉시 담생을 예우하고 주서(主婿)로 삼았으며, 표문을 올려 그 아들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60-14(1774) 이막(李邈)
유안(劉晏) 휘하의 판관(判官) 이막은 장원이 고릉현(高陵縣)에 있었는데, 장원의 전객(佃客 : 소작농)이 스스로 말했다.
“저희들은 오랫동안 도적질을 했는데, 근자에 한 옛 무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장원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아주 크고 높다란 무덤이 있는데, 소나무 숲 사이로 200보를 들어갔더니 무덤이 나왔습니다. 무덤가에 부러져 풀 속에 넘어진 비석이 있었는데, 글자가 닳아 없어져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 그 옆으로 수십 장(丈)을 파 들어가자 돌문이 하나 나왔는데, 쇳물로 봉해져 있었습니다. 며칠 동안 똥물을 끼얹어 부식시키자 문이 겨우 열렸습니다. 문이 열리자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 몇 사람이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 나가려고 했지만, 제가 살펴보니 다른 것은 없었기에 틀림없이 장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 안으로 돌을 던져 보게 했는데, 돌을 던질 때마다 화살이 번번이 날아왔습니다. 10여 개의 돌을 던지자 화살이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횃불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서 중문(重門)을 열자 나무 인형 수십 개가 눈을 뜨고 검을 휘둘러 다시 몇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나무 인형을 때리자 그들의 병기가 모두 땅에 떨어졌습니다. 사방의 벽에 각각 호위병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고, 남쪽 벽에는 옻칠한 커다란 관이 쇠줄에 매달려 있었으며, 그 아래로 금옥과 구슬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 그것을 미처 훔치기도 전에 관의 양쪽 모서리에서 갑자기 쏴아! 하고 바람이 일더니 모래가 사람들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습니다. 순식간에 바람이 심하게 불자 모래가 마치 물처럼 흘러나오더니 넓적다리까지 잠겼습니다.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달아나 문을 나가려 했는데 문은 이미 닫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또 모래에 파묻혀 죽자, 저희들은 함께 땅에 술을 뿌리고 사죄하면서 다시는 무덤을 도굴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평 : 《수경(水經)》에서 이르길, 월왕(越王) 구천(勾踐)이 낭야(琅琊)에 도읍을 정할 때 윤상(允常 : 구천의 부친)의 무덤을 옮기려 했는데, 무덤 안에서 바람이 일더니 모래가 날아와 사람을 덮치는 바람에 접근할 수 없어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한구의(漢舊儀)》에 따르면, 장작대장(將作大匠)이 능을 조성할 때 능 안을 사방 1장 크기로 만들고 그 바깥에 쇠뇌와 불화살과 모래를 보이지 않게 설치해 두었다고 한다. 아마도 옛날에 무덤을 만들 때는 무덤 안에 이와 같은 장치가 있었던 것 같다. 미 : 지금 이런 장치법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