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6(0672) 반언(潘彦)
[당나라] 함형(咸亨) 연간(670∼674)에 패주(貝州)의 반언은 쌍륙(雙陸)을 좋아해서 가는 곳마다 항상 쌍륙판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한번은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했는데, 오른손으로는 판자 하나를 잡고 왼손으로는 쌍륙판을 안고 입으로는 쌍륙 주사위를 물었다. 1박 2일 동안 표류한 끝에 해안에 이르렀는데, 두 손은 뼈가 드러날 정도였지만 쌍륙판은 끝내 놓지 않았으며 주사위도 입에 그대로 있었다.
27-15(0689) 순거백(荀巨伯)
순거백이 멀리 친구의 병문안을 하러 갔는데, 때마침 호적(胡賊)이 그 군(郡)을 공격했다. 친구가 순거백에게 말했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니 자네는 떠나는 게 좋겠네.”
그러자 순거백이 말했다.
“멀리 자네를 보러 왔는데, 지금 환난이 있다고 자네를 버리고 떠난다면 어찌 내가 행할 바이겠는가?”
호적이 당도하고 나서 순거백에게 말했다.
“대군이 여기에 밀어닥쳐 온 군이 텅 비었는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혼자 남아 있느냐?”
순거백이 말했다.
“친구가 병이 들어서 차마 버리고 떠날 수가 없으니, 차라리 내 몸으로 친구의 목숨을 대신하고자 한다.”
호적은 그를 남다르다고 여기면서 서로 말했다.
“우리처럼 의리 없는 사람이 의로운 나라에 잘못 들어왔구나.”
그러고는 공격을 멈추고 물러감으로써 온 군이 온전할 수 있었다. 미 : 호적도 칭찬할 만하다.
평 : 우정을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군(郡)도 보전할 수 있었으니 그 공덕이 크다.
30-1(0731) 진사과에 대한 총론(總叙進士科)
진사과는 수(隋)나라 대업(大業) 연간(605∼617)에 시작되었으며,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627∼649)과 영휘(永徽) 연간(650∼656) 무렵에 흥성했다. 벼슬아치 가운데 그 지위가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더라도 진사 출신이 아닌 자는 끝내 훌륭하다고 인정받지 못했다. 해마다 추천된 응시자가 늘 800∼900명을 밑돌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존중해서 “백의공경(白衣公卿)” 또는 “일품백삼(一品白衫)”이라 불렀으며, 진사시의 어려움을 두고 “서른 살이면 명경(明經)으로서는 늙었고, 쉰 살이면 진사로서는 젊다”라고 말했다. 제아무리 탁월한 재주와 변화의 이치에 통달한 법술, 소진(蘇秦)·장의(張儀) 같은 변설과 형가(荊軻)·섭정(聶政) 같은 담력, 중유(仲由 : 자로) 같은 무용(武勇)과 자방(子房 : 장양) 같은 계책, 홍양(弘羊 : 상홍양) 같은 산술(算術)과 방삭(方朔 : 동방삭) 같은 해학을 자부하더라도 모두 이것만으로는 이름을 드러낼 수 없다고 여겼다. 이들 가운데 과거 시험장에서 늙어 죽은 자도 있었지만 또한 한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미 : 과거 급제를 얘기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뽐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런 시가 있었다.
“태종(太宗) 황제께서 진정 훌륭한 계책 세우니, 얻은 영웅들 모두 백발이라네.”
그들이 모여서 시험 보는 곳을 “거장(擧場)”이라 하고, 응시자들을 통상 “수재(秀才)”라 칭하고, 명함을 보내는 것을 “향공(鄕貢)”이라 하고, 급제한 자를 “전진사(前進士)”라 하고, 서로 추숭하고 존경해 “선배(先輩)”라 하고, 함께 합격한 자를 “동년(同年)”이라 하고, 시험을 주관하는 관리를 “좌주(座主)”라 하고, 경조부(京兆府)의 시험에서 선발되어 올라온 자를 “등제(等第)”라 하고, 외지의 주부(州府)에서 시험을 거치지 않고 추천된 자를 “발해(拔解)”라 하고, 시험 보기 전에 각자 서로를 보증해 주는 것을 “합보(合保)”라 하고, 함께 모여 기거하면서 시문을 짓는 것을 “사시(私試)”라 하고, 요직에 있는 권세가를 찾아가 청탁하는 것을 “관절(關節)”이라 하고, 명성을 드날리는 것을 “환왕(還往)”이라 하고, 이미 급제한 뒤에 이름을 자은사탑(慈恩寺塔)에 열거하는 것을 “제명(題名)”이라 한다. 곡강정자(曲江亭子)에서 열리는 성대한 연회를 “곡강회(曲江會)”라 하는데, 곡강회는 관시(關試) 후에 열리므로 또한 “문희연(聞喜宴)”이라고도 하고, 연회가 끝난 후에 동년들이 각자 갈 곳으로 떠나므로 또한 “이회(離會)”라고도 한다. 명적(名籍)에 등록하고 들어가 선발되는 것을 “춘위(春闈 : 예부시)”라 하고, 급제하지 못했지만 배불리 먹고 취하는 것을 “타모소(打毷氉)”라 하고, 이름을 숨긴 채 비방을 지어내는 것을 “무명자(無名子)”라 하고, 낙방하고 물러나 [도성에 머물면서] 학업을 계속하는 것을 “과하(過夏)”라 하고, 낙방한 뒤 학업을 닦으면서 시문을 써내는 것을 “하과(夏課)”라 하고, 책을 감춰 가지고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을 “서책(書策)”이라 한다. 이것이 진사과의 대략이다. 그 풍속은 학덕 있는 선배들에게 달렸고, 그 처리의 권한은 담당 관리에게 있었다.
평 : 당나라 말의 거인(舉人)들은 문예를 짓는 것을 따지지 않고 그저 요로의 인사를 배알하고 청탁하는 데에만 열심이었는데, 이를 “정절(精切)”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