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
이념의 세계가 무너지며 펼쳐지는 파괴적인 사랑과 한 소녀의 성장 이야기
“내 장례식에 올 거야?” 이야기는 자신의 장례식에 올 것이냐는 반복된 물음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넉 달 뒤의 그의 장례식 날, 그녀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이후 누군가가 그녀에게 커다란 상자 두 개를 전해주고, 순식간에 무대는 그녀가 열아홉이었던 수십 년 전의 평범했던 하루로 전환된다.
1986년 7월 11일, 동베를린. 두 사람은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다. 열아홉 소녀인 카타리나와 쉰셋의 유부남 한스는 음악과 예술을 매개로 쉽게 가까워진다. “당신은 나랑 자야 해요.” 카타리나가 선을 넘고, 한스는 이에 응한다. 이들의 부정不正한 사랑은 숱한 위기를 맞고, 카타리나가 동료인 바딤과 가까워지며 관계는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닫는다. 설핏 두 사람 사이의 치정으로만 보이는 이 이야기는 마지막에 밝혀지는 반전을 계기로, 개인과 역사가 어떻게 얽히고설키는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작가의 치밀한 설계 덕분에 이 책을 두 번 읽은 독자는 에르펜베크가 숨겨놓은 암시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맛볼 것이다.
『카이로스』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반복되는 교차와 대비다. 에르펜베크는 문장의 대구와 상황의 대비를 통해 두 사람의 심리 변화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결코 다시는 오늘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한스는 생각한다. 영원히 이럴 거라고 카타리나는 생각한다”와 같은 문장은 수도 없이 반복된다. 이러한 대비는 심리 서술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동독으로 대표되는 무너지는 구체제와 독일 통일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의 대조라고도 볼 수 있다.
동독 출신의 작가 예니 에르펜베크
시간, 희망, 그리고 물거품이 된 희망을 그리다
『카이로스』의 저자 예니 에르펜베크의 삶은 작중 주인공 카타리나의 삶과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작가와 카타리나는 모두 1967년생으로 나이가 같으며, 동베를린 출신으로 고향도 같다. 두 사람 모두 국영 출판사에서 직업 교육을 받았고,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 극장에서 일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소설이 자전적인 소설은 아니며, “박물관으로서의 소설”이라고 일축했다.
에르펜베크는 미국의 유명 문예지 『파리 리뷰』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갑자기 비상한 ‘자유’라는 개념이 혼란스러웠다며,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자신의 어린 시절은 ‘박물관’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 소설은 자전적 소설은 아니지만, 이러한 작가의 성장 배경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동베를린의 생생한 풍경은 개방된 사회의 눈으로 보기에는 기이할 정도로 폐쇄적이다. 그러나 카타리나와 한스, 그리고 작가인 에르펜베크에게는 이러한 일상은 평화롭고 안전한 세상이었다. 우리는 흔히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해방’으로 이해하곤 하지만, 『카이로스』가 그리는 장벽의 붕괴는 ‘상실’에 가깝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더불어 철저한 자료 조사를 통해 베를린 장벽 붕괴 전후 독일에 감도는 긴장을 선명하게 묘사한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나라, 독일민주공화국. 『카이로스』는 그곳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리얼리즘적 다큐멘터리이자, 개인과 체제, 시대와 역사가 어떻게 서로 복잡하게 관계 맺으며 직조되는지에 대한 우화다. 한국 독자들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원작에는 없는 동서독의 지도와 베를린 장벽 지도를 넣었다. 이 소설을 읽는 시간이 우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는 에르펜베크의 말처럼, 한국 독자들에게도 이 소설이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도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