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은커녕 메시아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특히 기독교에서는 알게 모르게 유대인 개개인을 배신자 가룟 유다와 동일시했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를 거부했기에 그에 상응하는 징벌로 거의 재건할 수 없을 만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가 자행되었다고 믿는다. 이와 같은 배타적 신앙의 경향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끔찍하기만 한 종교의 몰지각한 일면을 노출할 뿐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가룟 ‘유다’라는 이름은 다수의 제자들이 갈릴리 지방 출신이었던 것과 달리 유다가 ‘게리옷’이라는 지명과 관련된 유대 어느 지방 출신이었으리라는 점에서 단순히 ‘유대에서 온 사람’을 지칭한 사례일 수 있다. _046쪽
그렇다면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이라는 사실을 공표했을 때 비로소 예수의 속은 후련해졌을까? 그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야흐로 배신자를 지목한다는 것은 당장 예수의 십자가 수난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마침내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자기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만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런데도 제자들은 자신들이 배신자가 아니기만 바랐다. 심지어 그들은 적신 빵 조각을 받아드는 사람이 바로 배신자라고 일러주고 나서 예수가 즉시 그 빵조각을 가룟 유다에게 건네주었는데도 예수를 고발하게 될 자가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_081쪽
성만찬이 예수의 공생애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교회를 지탱시켜온 중요한 성례전 가운데 핵심이라면 당신은 궁금하지 않은가. 가룟 유다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 흘려야 하는 피의 길로 예수를 인도 한 장본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가룟 유다는 사탄의 하수인이어야만 하는가? 유다의 배신 이야기에서 사탄을 처음으로 끌어들인 것은 누가였다. _087쪽
아무튼 마가복음, 그리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통해서는 최후의 만찬 직후 가룟 유다가 한동안 그 자리에서 꾸물거렸는지 아니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래서 유독 요한복음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길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유다는 그 빵조각을 받고 나서, 곧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이것이 13이라는 숫자에 불길한 기운을 불어넣었을 믿음의 강요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점차 집단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으면서 낮보다 밤이, 빛보다 어둠이, 사랑보다 증오가, 자비보다 분노가, 축복보다 저주가 오직 한 사람, 바로 가룟 유다에게만 퍼부어졌다. _113쪽
유대교든 가톨릭이든 그리스 정교든 이슬람교든 개신교든 마찬가지다. 사이비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제도권의 종교마저도 성직자와 교인이 자신들의 경전을 제대로 읽고자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노력해본 적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모두가 문자주의에 포로가 되어 자신들만의 경전 속에 갇혀 산다. 걸핏하면 자신들의 종교만이 ‘정통’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이라며 타종교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경멸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개신교만이 ‘오직 성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더구나 마르틴 루터(Martin Ruther)는 성서 무오주의자가 아니었다. _140쪽
그러나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도 있다. 유다의 배신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그 배반의 동기는 이제까지의 추론과는 정반대일지 모른다. 만일 예수 공동체에서 특히 유다가 묵시론자였다면, 그는 당장이라도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염원했을 것이다. 반면에 1세기 무렵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가능성만으로 지속되어왔듯이, 예수의 가르침은 그 당시에도 ‘지상의 낙원’을 위한 전망으로 받아들여졌을 법하다. 그런데 이를 더는 두고만 지켜볼 수 없었던 유다가 결국 비정하게 예수를 당국에 고발한 것이다. _214쪽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은 사도 요한을 제외한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거의 모두 죽고 나서 자신들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만일 유다가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전승이 떠돌았다면, 누가가 왜 그토록 유다의 최후를 처참하게 전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누가는 자신이 열렬히 믿고자 한 예수의 부활을 전적으로 유다에게 맡기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_217쪽
가룟 유다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뜨거운 감정을 감춘 채 예수에게 차디차게 입을 맞춘 것인가? 발터 옌스(Walter Jens)는 그렇다고 답했다. 왜냐하면 발터 옌스의 생각으로는 오늘날의 교회가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듯이 만일 유다가 사탄의 꾐에 넘어갔다든지, 아니면 천성이 사탄과 같아서 예수를 배신했다면 유다는 먼저 예수의 인상착의부터 병사들에게 귀띔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병사들과 동행한 다음에는 야비하게 숨어서 손짓하거나, 그마저도 아니라면 그들이 예수를 다른 제자들과 혼동하지 않도록 예수가 지목되면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급히 그 자리에서 도망쳤으리라는 것이다. _242~243쪽
초기 교권주의자들은 유다의 희생을 전하는 문서와 함께 다양한 복음서들을 금서 목록으로 지정하고 삼엄하게 감시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준엄한 심판이었다.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규정한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글들을 산 채로 매장한 것이다. 급기야 불태우기까지 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기독교판 분서갱유라고 할 만했다. 한번 이단 문서로 낙인찍히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지만, 뒤로 빼돌려진 몇몇 필사본이 존재한다는 풍문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떠돌아다녔다. 그 가운데 유다복음이 있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_244~245쪽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의연했다기보다 몹시 처연하기만 했던 것은 어쩌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 세상이 돌아가리라는 예수의 서글픈 예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더러는 각오한 죽음이 예기치 못한 죽음보다 훨씬 많은 비밀을 침묵에 남겨둘 때가 있다. 그것도 살아가야 하는 자들이 꼭 알아야 할 진리까지 함축하고서 말이다. 예수와 유다, 이 두 사람이 죽기를 각오하면서까지 잠정적으로 전하고자 한 것은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음과 같이 했다는 예수의 말과 행동에 담겨 있지 않을까 싶다. _265쪽
성서는 진리의 세계가 아니라 가치의 세계다. 가치의 세계에서는 다양한 진리가 혼재해 있기 마련이다. 그 다양한 진리 가운데서 이 세계와 소통 가능한 가치만이 성서의 진리일 것이다. 그리고 만일 예수가 신이라면 2000년이라는 시간이 다 지나도록 그의 옆구리에 난 상처는 단 한 순간도 말끔히 아문 적 없이 흉지고 터지고 덧나고 아물길 반복하고 있으리라. 그래서 나는 그가 신이 아니었으면 하고 바란다. 예수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면서 마태복음 10장 16절을 통해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 유다가 뱀과 같았다면 그는 지혜로웠을 것이고 예수가 양과 같았다면 그는 순진했으리라. 그러므로 또 다른 무형의 십자가를 짊어졌던 가룟 유다가 이제라도 억울함을 풀고 고이 잠들길 진심으로 기원해본다. _3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