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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입맞춤


  • ISBN-13
    979-11-7274-018-4 (03230)
  • 출판사 / 임프린트
    파람북 / 파람북
  • 정가
    18,5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4-11-08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박진희
  • 번역
    -
  • 메인주제어
    경전해설, 주석, 평론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경전해설, 주석, 평론 #성서 #예수 #유다 #마리아
  • 도서유형
    종이책, 무선제본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50 * 220 mm, 304 Page

책소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인간 예수와 유다의 관계,

이 책은 성경의 복음에서 가룟 유다를 이해했던

기존의 방식을 돌아보며,

그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었던 일들의 의미를 새롭게 규명하고 있다.

 

이 책은 성서가 희극과 비극 사이를 넘나든 삶의 대서사시라는 점에서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의 사건을 다시금 되짚어본 나름의 결실이다. ‘누가 유다에게 배신자라는 누명을 씌웠는가’라는 부제가 전체적 의미를 함축하듯이, 신약성서에서 배신자로 인식된 가룟 유다의 내러티브를 기존의 이해방식과 달리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한 시도다. 그 핵심은 정말 유다가 예수를 배반했는가 하는 점이다. 설령 성서의 주장대로 유다가 예수를 배신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어쩌면 예수와 유다의 내밀한 합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거나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복음서 저자들의 일방적인 견해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관점에서 성서 행간의 의미를 추적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성서를 재맥락화해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글은 예수의 죽음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던 기독교가 어째서 유다를 배신자로 몰아가야만 했을까 하는 물음에 대한 천착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유다와 관련된 4복음서의 내용을 성서에서 인용하는 것이 불가피했고, 이를 토대로 면밀하게 비교하고 검토하고 있다.

 

목차

서문

 

1장 유다,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팔아넘기려고 그들과 만나다

유다는 누구인가

배신자에 대한 정경복음서 저자들의 입장

히브리 성서가 예수의 몸값에 미친 영향

마지막까지 예수와 함께한 여성들과 그 후예들

오늘날까지 부정적이기만 한 유다라는 명칭

예수의 족보와 유다라는 이름들 

육신으로 얽힌 예수의 가족

예수 시대의 대제사장들

예수가 빌라도 앞으로 끌려가기 전에

 

2장 유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오다

최후의 만찬에 대한 정경복음서 저자들의 입장

‘13’이라는 불길한 숫자와 다락방

최후의 만찬에 대한 사뭇 다른 관점

히브리 성서에서 차용했을 유다의 ‘은돈 삼십 닢’

기도에 대한 예수의 유산

예수에 대한 유다의 배신은 하나님의 명령인가 

예수가 저주한 무화과나무

 

3장 죽지 않았더라면 유다, 그날의 일들을 다르게 전했을 것이다

사본으로만 구성된 신약성서

제자들과 함께라서 더욱 고독했을 예수

진정한 의미의 십자가

세속적인, 너무나 세속적인 교회의 전통

무심코 지나치지 말아야 할 신약성서의 이름들

히브리 성서에서 차용한 또 다른 파편적 서사들

 

4장 유다, 뜨거운 감정을 들키지 않은 채 차디차게 입맞추다

예수의 마지막 기도와 얽힌 정황들

공관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가상사언

성서를 근거로 통용되는 속설들

예수가 사랑한 제자 요한이 전하는 그의 가상삼언

예수와 성가족

시편 69편을 바탕으로 되살린 예수의 참된 가르침 

예수의 일곱 가지 말이 가상칠언인 이유

잔인한 입맞춤 현장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항들

유다의 배신에 대한 바울의 입장

유다의 배신에 관한 새로운 관점

예수의 자의식

‘배신자’라는 유다의 역할에 후새가 미친 영향

유다의 시각으로 예수를 바라보고자 한 복음서

악마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

관계적일 수밖에 없는 겸손과 교만

 

5장 유다, 배신자라는 오명을 벗고 이 책에서 안식을 찾다 

예수의 웃음에 담긴 첫 번째 의미

예수의 웃음에 담긴 두 번째 의미

예수의 웃음에 담긴 세 번째 의미

예수의 웃음에 담긴 네 번째 의미

본문인용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은커녕 메시아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특히 기독교에서는 알게 모르게 유대인 개개인을 배신자 가룟 유다와 동일시했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를 거부했기에 그에 상응하는 징벌로 거의 재건할 수 없을 만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가 자행되었다고 믿는다. 이와 같은 배타적 신앙의 경향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끔찍하기만 한 종교의 몰지각한 일면을 노출할 뿐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가룟 ‘유다’라는 이름은 다수의 제자들이 갈릴리 지방 출신이었던 것과 달리 유다가 ‘게리옷’이라는 지명과 관련된 유대 어느 지방 출신이었으리라는 점에서 단순히 ‘유대에서 온 사람’을 지칭한 사례일 수 있다. _046쪽

 

그렇다면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이라는 사실을 공표했을 때 비로소 예수의 속은 후련해졌을까? 그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야흐로 배신자를 지목한다는 것은 당장 예수의 십자가 수난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마침내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자기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만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런데도 제자들은 자신들이 배신자가 아니기만 바랐다. 심지어 그들은 적신 빵 조각을 받아드는 사람이 바로 배신자라고 일러주고 나서 예수가 즉시 그 빵조각을 가룟 유다에게 건네주었는데도 예수를 고발하게 될 자가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_081쪽

 

성만찬이 예수의 공생애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교회를 지탱시켜온 중요한 성례전 가운데 핵심이라면 당신은 궁금하지 않은가. 가룟 유다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 흘려야 하는 피의 길로 예수를 인도 한 장본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가룟 유다는 사탄의 하수인이어야만 하는가? 유다의 배신 이야기에서 사탄을 처음으로 끌어들인 것은 누가였다. _087쪽

 

아무튼 마가복음, 그리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통해서는 최후의 만찬 직후 가룟 유다가 한동안 그 자리에서 꾸물거렸는지 아니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래서 유독 요한복음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길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유다는 그 빵조각을 받고 나서, 곧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이것이 13이라는 숫자에 불길한 기운을 불어넣었을 믿음의 강요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점차 집단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으면서 낮보다 밤이, 빛보다 어둠이, 사랑보다 증오가, 자비보다 분노가, 축복보다 저주가 오직 한 사람, 바로 가룟 유다에게만 퍼부어졌다. _113쪽

 

유대교든 가톨릭이든 그리스 정교든 이슬람교든 개신교든 마찬가지다. 사이비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제도권의 종교마저도 성직자와 교인이 자신들의 경전을 제대로 읽고자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노력해본 적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모두가 문자주의에 포로가 되어 자신들만의 경전 속에 갇혀 산다. 걸핏하면 자신들의 종교만이 ‘정통’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이라며 타종교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경멸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개신교만이 ‘오직 성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더구나 마르틴 루터(Martin Ruther)는 성서 무오주의자가 아니었다. _140쪽

 

그러나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도 있다. 유다의 배신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그 배반의 동기는 이제까지의 추론과는 정반대일지 모른다. 만일 예수 공동체에서 특히 유다가 묵시론자였다면, 그는 당장이라도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염원했을 것이다. 반면에 1세기 무렵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가능성만으로 지속되어왔듯이, 예수의 가르침은 그 당시에도 ‘지상의 낙원’을 위한 전망으로 받아들여졌을 법하다. 그런데 이를 더는 두고만 지켜볼 수 없었던 유다가 결국 비정하게 예수를 당국에 고발한 것이다. _214쪽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은 사도 요한을 제외한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거의 모두 죽고 나서 자신들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만일 유다가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전승이 떠돌았다면, 누가가 왜 그토록 유다의 최후를 처참하게 전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누가는 자신이 열렬히 믿고자 한 예수의 부활을 전적으로 유다에게 맡기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_217쪽

 

가룟 유다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뜨거운 감정을 감춘 채 예수에게 차디차게 입을 맞춘 것인가? 발터 옌스(Walter Jens)는 그렇다고 답했다. 왜냐하면 발터 옌스의 생각으로는 오늘날의 교회가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듯이 만일 유다가 사탄의 꾐에 넘어갔다든지, 아니면 천성이 사탄과 같아서 예수를 배신했다면 유다는 먼저 예수의 인상착의부터 병사들에게 귀띔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병사들과 동행한 다음에는 야비하게 숨어서 손짓하거나, 그마저도 아니라면 그들이 예수를 다른 제자들과 혼동하지 않도록 예수가 지목되면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급히 그 자리에서 도망쳤으리라는 것이다. _242~243쪽

 

 

초기 교권주의자들은 유다의 희생을 전하는 문서와 함께 다양한 복음서들을 금서 목록으로 지정하고 삼엄하게 감시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준엄한 심판이었다.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규정한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글들을 산 채로 매장한 것이다. 급기야 불태우기까지 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기독교판 분서갱유라고 할 만했다. 한번 이단 문서로 낙인찍히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지만, 뒤로 빼돌려진 몇몇 필사본이 존재한다는 풍문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떠돌아다녔다. 그 가운데 유다복음이 있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_244~245쪽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의연했다기보다 몹시 처연하기만 했던 것은 어쩌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 세상이 돌아가리라는 예수의 서글픈 예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더러는 각오한 죽음이 예기치 못한 죽음보다 훨씬 많은 비밀을 침묵에 남겨둘 때가 있다. 그것도 살아가야 하는 자들이 꼭 알아야 할 진리까지 함축하고서 말이다. 예수와 유다, 이 두 사람이 죽기를 각오하면서까지 잠정적으로 전하고자 한 것은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음과 같이 했다는 예수의 말과 행동에 담겨 있지 않을까 싶다. _265쪽

 

성서는 진리의 세계가 아니라 가치의 세계다. 가치의 세계에서는 다양한 진리가 혼재해 있기 마련이다. 그 다양한 진리 가운데서 이 세계와 소통 가능한 가치만이 성서의 진리일 것이다. 그리고 만일 예수가 신이라면 2000년이라는 시간이 다 지나도록 그의 옆구리에 난 상처는 단 한 순간도 말끔히 아문 적 없이 흉지고 터지고 덧나고 아물길 반복하고 있으리라. 그래서 나는 그가 신이 아니었으면 하고 바란다. 예수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면서 마태복음 10장 16절을 통해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 유다가 뱀과 같았다면 그는 지혜로웠을 것이고 예수가 양과 같았다면 그는 순진했으리라. 그러므로 또 다른 무형의 십자가를 짊어졌던 가룟 유다가 이제라도 억울함을 풀고 고이 잠들길 진심으로 기원해본다. _304쪽

 

서평

우리가 미처 못 본 유다를 둘러싼 이야기

그 안에 정경복음서의 미스테리가 숨어 있다

 

오늘날까지도 유다의 배신은 잔인한 입맞춤이라는 비정한 수식어가 따라붙어 다닐 만큼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다. 공관복음서의 마가복음과 마태복음만 하더라도 유다의 배신을 다룰 때는 사탄을 언급하지 않는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보다 유다를 훨씬 더 야비하게 묘사하는데, 마가복음에서 확실하게 제시하지 못한 배반의 동기를 예수의 몸값이 많든 적든 이를 노린 자의 소행으로 몰아가고 싶어 한다. 누가복음은 유다의 이야기에 훨씬 더 가혹한 요소를 가미했다. 누가는 사탄이 가룟 유다를 배신으로 끌어들였다고 말한다. 요한복음은 유다를 두고 직접적으로 악마라고까지 하는데, 요한의 입장에서는 이런 유다라면 삼백 데나리온씩이나 하는 아까운 향유를 예수의 발에다 붓는 광경을 차마 지켜만 볼 수 없었기에 위선을 떨었다고 이해한다. 요한에게 유다라는 작자는 타고나기를 사탄(누가복음에서 얻은 영감일 테지만), 즉 태생적으로 악마였다. 마가복음, 그리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통해서는 최후의 만찬 직후 가룟 유다가 한동안 그 자리에서 꾸물거렸는지 아니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래서 유독 요한복음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길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유다는 그 빵조각을 받고 나서, 곧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이것이 13이라는 숫자에 불길한 기운을 불어넣었을 믿음의 강요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점차 집단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으면서 낮보다 밤이, 빛보다 어둠이, 사랑보다 증오가, 자비보다 분노가, 축복보다 저주가 오직 한 사람, 바로 가룟 유다에게만 퍼부어졌다.

 

하지만 전체 신약성서에서 의아한 점도 있다. 바울은 기독교 선교에서 결정적인 인물인데, 왜 바울은 가룟 유다의 배신 이야기라든지 빈 무덤 이야기라든지 예수 부활에 대한 여인들의 증언이든지 간에 이를 그들에게 들었을 법도 한데 왜 그가 작성했다고 인정되는 서신, 즉 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로마서 등에서 이를 함구했을까? 만일 유다가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전승이 떠돌았다면, 누가가 왜 그토록 유다의 최후를 처참하게 전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누가는 자신이 열렬히 믿고자 한 예수의 부활을 전적으로 유다에게 맡기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마가가 유다의 최후와 예수의 부활을 동시에 다루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지 앞으로도 알 수 없으리라. 하지만 만일 당신이 이제까지 붙들었던 당신의 믿음을 돌아보고자 한다면, 당신은 마가가 유다의 최후와 예수의 부활을 함부로 전하지 않았던 이유에 한 걸음 정도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유다복음, 우리가 미처 몰랐던 유다에 관한 또 다른 목소리

 

초기 교권주의자들은 유다의 희생을 전하는 문서와 함께 다양한 복음서를 금서 목록으로 지정하고 삼엄하게 감시했다. 그럼에도 뒤로 빼돌려진 몇몇 필사본이 존재한다는 풍문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떠돌아다녔다. 그 가운데 유다복음이 있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실제로 유다복음은 존재했다. 미국의 성서학자 바트 어만은 유다복음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이 복음에 따르면 유다는 예수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예수가 전하려고 한 진리를 유다 한 사람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프라이스도 이렇게 말했다. “유다는 자신의 행위가 배신으로 보일지라도 예수를 배반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유다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뜻깊은 일을 완수했다. 우리는 유다를 존경하고 칭송해야 한다. 왜냐하면 유다를 통해 십자가의 구원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었으며 하늘로부터 내려온 계시가 이로써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랄 만한 점은 유다복음 전에도 이러한 목소리가 있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고 발터 옌스 같은 소설가들도 자신들의 영감을 유다복음에 빚졌던 게 아니라 자신들의 견해가 틀리지 않았다는 점을 사후의 찬사로써 유다복음을 통해 확인받았다. 가룟 유다의 배신을 새롭게 조망하는 이러한 견해는 믿음의 강요라는 선택지가 두 개뿐인 이분법적인 신앙관과 결코 어우러질 수는 없다. 앞으로도 대다수 기독교인은 끊임없이 유다가 저주받았다며 멸시하길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다를 위한 변명, 배신자라는 오명을 벗고 이 책에서 안식을 찾다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을지라도 그리스도는 무덤에서 태어났다면,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최후를 맞이했다는 믿음이야말로 그의 죽음을 더욱 숭고하고 장엄하게 만든 유다의 고발 없이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죽음은 유다의 잔인한 배신의 입맞춤 없이는 인류의 극소수가 감당하기도 하는 위대한 희생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저자는 다른 무형의 십자가를 짊어졌던 가룟 유다가 이제라도 억울함을 풀고 고이 잠들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이 책은 이러한 관점에서 가룟 유다를 이해해 왔던 기존의 전통적 방식부터 살펴보고, 다윗의 요청으로 그를 배신한 척 행동했던 ‘후새’라고 하는 인물과 예수의 사람이었던 유다를 겹쳐봄으로써 그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었던 일들의 의미를 새롭게 규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앞으로도 성서가 인류의 찬란한 문화유산으로 남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성서는 진리의 세계가 아니라 가치의 세계다. 가치의 세계에서는 다양한 진리가 혼재해 있기 마련이다. 그 다양한 진리 가운데서 이 세계와 소통 가능한 가치만이 성서의 진리일 것이다. 

저자소개

저자 : 박진희
저자는 자신과 신의 관계를 이율배반적이라고 말한다. 무신론자인 저자의 견해가 옳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신이 존재한다면 자신의 견해야말로 그저 처량한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이유에서다. 신과 자신의 관계가 이율배반적이지 않길 바라는 신앙인의 관점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자는 무신론자이기에 감지하지 못한 자신의 편견이 유신론자이기에 감지하지 못했을 신앙인의 선입견을 들춰내는 일에만 몰입하려는 열정을 경계하고자 한다. 또한 종교와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으니 그의 견해야말로 객관적일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와 모순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길 원한다. 무신론자인 작가가 신이라는 존재와 그 개념에 이제껏 꼼짝없이 붙들려 있는 까닭일 것이고, 바야흐로 이 글이 저자의 이력에 있어 첫 줄이길 바라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성서가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서 인류의 유산으로 생각하는 저자는 끊임없이 성서의 행간과 공백을 메워가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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