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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 원전 (3권)


  • ISBN-13
    979-11-6684-333-4 (94230)
  • 출판사 / 임프린트
    세창출판사 / 세창출판사
  • 정가
    38,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4-11-15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마태오 리치
  • 번역
    김혜경
  • 메인주제어
    종교: 일반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종교: 일반
  • 도서유형
    종이책, 양장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52 * 225 mm, 492 Page

책소개

 

 『리치 원전(Fonti Ricciane)』은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1539~1606)의 마지막 명령에 따라,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가 사망하기 전 3년 동안(1607~1610), 중국선교를 시작한 1583년부터 일자별로 상세한 활동을 기록한 “그리스도교의 중국 진출기”다.

본서는 당시 중국 관련 정보는 물론 근대 초, 최초 서양인의 눈에 들어온 극동 아시아의 상황과 국제정세 및 동서양이 먼저 무엇을 주고받았는지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원전에 각주를 꼼꼼하게 넣어 정리, 기록한 예수회 중국학자 델리야(Pasquale M. D’Elia S.I., 1890~1963) 덕분에 책이 유럽으로 전해진 17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유럽 사회의 지식층과 사회 전반에서 아시아에 관한 관심과 영향을 알 수 있다. 중국에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조선에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일본에는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을 불러일으키는 근거가 되었고, 서양에는 계몽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동양에서 서양에 관한 관심은 선교사들의 서양문화 전수를 통해서지만, 서양에서 중국에 관한 관심은 이 책이 유럽에 전해지면서부터였다.

리치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로서 ‘적응주의’ 방식에 따라 ‘문화 대화’, ‘문화 외교’를 주도함으로써, 동서양 교섭이 양쪽에서 문화창발(文化創發)의 계기가 되는 데 기여했다. 다양한 문화와 문명이 다원적이고 포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구가 족 시대에 화합과 공존을 표방한 세계시민(global citizenship)의 모델이자 문화 교류의 방향을 보여 주었다. 그가 원칙으로 삼은 ‘적응주의’는 단순한 맞춤형 선교전략이 아니라, 타자를 대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목차

3권 차례 

 

◎ 참고도서 약어표_26

◎ 일러두기_43

 

 

4책 • 제1부(제1장~제10장) IV. 남경 수도원(1597년 7월 20일부터 1600년 5월 19일까지)

제1장 마태오 리치가 상서 왕충명(王忠銘)의 도움으로 라자로 카타네오 신부와 함께 남경으로 돌아가게 된 것에 대해(1597년 7월 20일부터 1598년 7월 10일경까지) 50

제2장 신부들이 처음으로 북경 황궁에 가고, 마태오 리치가 어떻게 남경 총독의 부름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그리고 북경으로 가는 길에서 겪은 일에 대해(1598년 7월 10일경부터 1598년 9월 7일까지) 66제3장 신부들이 이번에는 북경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몰라 다시 남경으로 되돌아가게 된 일에 대해서(1598년 9월 8일부터 1598년 12월 5일까지) 88

제4장 라자로 카타네오 신부가 어떻게 짐을 가지고 임청(臨淸)에서 겨울을 났는지, 마태오 리치 신부가 소주와 남경에서 어떻게 거주하게 되었는지에 대해(1598년 12월 5일부터 1599년 2월까지) 110

제5장 마태오 리치가 어떻게 남경에서 수학 강의를 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공신력을 안겨 주고 열매를 가져다주었는지에 대해서(1599년 2월 6일 이후부터 1600년 5월 19일 이전까지) 135

제6장 남창의 많은 주요 인사들이 마태오 리치와 대화하고 싶어 한 것에 대해(1599년 초) 166

제7장 마태오 리치가 우상 종파의 한 유명한 승려와 거룩한 신앙에 관해 논한 것에 대해(1599년 초) 182

제8장 임청에서 겨울을 지낸 우리 형제들이 황제에게 줄 물건을 가지고 어떻게 남경에 도착하게 되었는지, 남경에서 어떻게 좋은 집을 매입할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1599년 2월부터 6월 5일경까지) 197

제9장 라자로 카타네오 신부가 마카오에 어떻게 귀환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남창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한 것에 대해서(1599년 6월 20일 무렵부터 1600년 3월경까지) 210

제10장 마태오 리치 신부가 디에고 판토하 신부와 두 명의 수사 종명인 페르난도와 에마누엘레 페레이라와 함께 어떻게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산동의 제녕에 도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1600년 3월부터 6월까지) 227

 

• 제2부(제11장~제20장) V. 북경 수도원(1601년 1월 21일부터 1602년 9월 21일까지)

 

제11장 우리가 임청(臨淸)과 천진위(天津衛)에서 겪은 일에 대해(1600년 6월부터 1601년 1월까지) 242

제12장 어떻게 중국의 황제가 신부들에게 진상품을 가지고 북경에 들어오라고 했는지, 첫 입성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1601년 1월부터 2월까지) 265

제13장 우리가 어떻게 주객사(主客司)의 지시를 받게 되었고, 외국 사절단들이 묵는 사이관(四夷館)에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거기에서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해(1601년 2월 25일경부터 5월 28일까지) 297

제14장 신부들이 직접 황제에게 탄원서를 쓰게 된 경위, 예부의 관리들이 신부들에게 사이관 밖에 거주하도록 허락하고 북경의 고위 인사들이 방문하여 위로하다(1601년 6월부터 12월까지) 324

제15장 우리가 북경에서 사귄 풍모강(馮慕岡)과 이아존(李我存), 이 두 인사와의 깊은 우정(1601년 6월부터 12월까지) 341

제16장 이 시기에 우상 종파가 겪은 커다란 수치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닥쳐오는 엄청난 고통으로부터 구해 주신 것에 대해(1602년부터 1604년 5월 25일까지) 369

제17장 그동안 소주(韶州) 수도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1599년 7월 초부터 1603년까지) 389

제18장 그동안 소주(韶州) 수도원에서 겪은 몇 가지 어려움에 대해(1599년부터 1603년까지) 418

제19장 남경 수도원의 발전과 서 바오로 박사의 개종에 대해(1600년 5월부터 1604년 2월까지) 450

제20장 마카오 콜레지움의 새 원장 발렌티노 카르발료 신부가 어떻게 마누엘 디아즈 신부를 중국 내륙으로 보내게 되었는지에 대해, 마태오 리치가 그의 편으로 선교 물품을 보내기 위해 그를 북경으로 부르게 된 것에 대해, 황궁에서 그리스도교가 순조롭게 출발하게 된 것에 대해(1600년 2월 1일부터 1602년 9월 21일까지) 470

 

본문인용

왕 상서는 우리의 일과 관련해서, 남경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면서, 신부들로부터 받은 선물이 많은데다 그들과의 약속을 물릴 수도 없는 상황이라 함께 북경으로 가기로 했다. 거기에서 친분이 있는 태감들을 통해 선물을 주고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는 남경성의 여섯 상서의 축하를 모아 황제의 생일에 맞추어 북경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의 짐과 선물은 하인 두 명과 함께 수로로 운반했다. 그는 신부들에게 자기 식구들과 함께 짐을 싣고 가는 배에 올라 수로로 갈 것을 제안했다. 그들이 탄 배는 매우 빠른 배로 가볍다고 해서 마선(馬船)이라고 불렀다. 가는 동안 배 안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큰 방이 있는 배를 빌렸다. 신부들과 자기 식구들이 넓게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_67면

 

조 총독은 친구 왕 상서가 잘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의 풍습에 따라 선물을 보냈는데, 거기에는 자기가 인쇄한 이 〈세계지도〉도 한 장 있었다. 왕 상서는 그것을 보고 마태오 신부가 보여 준 것과 너무도 비슷하여 즉시 사람을 보내 신부를 자기 관저로 불렀다. 그리고 다른 여러 문인 학자들에게 ‘지도’를 보여 주며 “보시오, 우리 중국에도 그대의 지도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세계의 전 지역에 대한 정보와 그 외의 것들에 대한 설명이 적힌 지도가 있소. 그러니 중국에서 그대가 이 분야의 첫 번째 저자는 아니오”라고 말했다. 신부는 ‘지도’를 보고 즉시 자신의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자기가 그 저자임을 밝히고, 모든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신부가 조경에 있을 때 세계지도를 인쇄한 적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_70면

 

소주 수도원에는 론고바르도 신부가 혼자서 프란체스코 마르티네스[황명사(黃明沙)] 수사와 있었고, 다른 한두 마카오 출신의 젊은이들은 오랫동안 신부가 중국에 오지 않는 것을 보고 자기들 외에는 동반할 사람이 없다고 느꼈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또 남경과 북경 두 황실에서 우리가 얻은 공신력 덕분에 그곳[소주]에도 그리스도교가 발전할 수 있도록 관청에서 거룩한 복음을 선포하는 데 가장 필요한 권한을 우리에게 주었다. 이에 그 도시의 주요 인사 몇 사람이 그리스도교를 믿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_390면

 

이렇듯 여성들에 관한 사례도 많았고, 후에 두세 가지, 귀족 부인 사례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깊은 신앙심으로 마치 수도원의 수녀처럼 헌신적이었다.

작은 고을들에서 기대 이상의 큰 성과를 올린 것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 도시는 오랜 세월 복음에 문을 닫아걸었고, 변두리에서부터 타오른 불꽃이 도시로 들어가 많은 개종자를 냈다. 거기에는 평민들뿐 아니라. 지방의 주요 인사들과 문인 및 부유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_404면

 

1603년 서광계는 볼 일이 있어 다시 남경으로 왔고, 조반니 다 로챠 신부를 방문했다. 신부는 그에게 성당을 보여 주었고, 그는 그 안에 모셔진 〈아기를 안은 성모 성화〉를 보고 경배했다. 그 기회에 신부는 그에게 우리의 거룩한 신앙에 관한 몇 가지 것들을 이야기했고, 그는 매우 주의 깊게, 열심히 들었다. 그는 즉시 우리의 신앙을 따르고 싶다고 했고, 밤늦도록 남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직 인쇄하지 않은 『천주교요天主敎要』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가지고 돌아갔다. 그는 밤새 이 두 권의 책을 모두 읽고, 책에서 가르치는 교리에 크게 만족했다. 그리고 다음 날 『천주교요』에서 가르치는 기도문들을 외워서 신부에게 와서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신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세례받는 문제를 결정하고 싶어 했다. _466-467면

서평

1910년 이탈리아 정부는 마태오 리치 서거 300주년을 기해, 동서양 문명의 가교가 된 ‘이탈리아의 위대한 아들’을 기억하기 위해 국가 주도로 이 책을 감수하여 발간하였다. 사업의 총책임은 예수회 소속 중국학자 델리야(Pasquale M. D’Elia S. I.) 신부가 맡았다. 

델리야는 이후 30여 년간 원전에서 언급하고 있는 행로를 따라 중국 현지를 답사하고, 기록을 고증하는 한편, 그때까지 연구된 명말청초 동서양 문명교류사의 모든 기록을 각주에 담아 1942년(Volume I)과 1949년(Volume II)에 두 권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책은 다섯 책(冊)으로 구분한 리치의 원문 텍스트를 본문으로 하고, 델리야가 검증한 내용과 그때까지 연구된 학문적 자료들을 각주로 달아 방대하고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책은 엄밀히 말해 ‘리치 원전과 델리아의 주석서 합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델리야는 그냥 『리치 원전, 그리스도교의 중국 진출기』로 편찬하여 소개하였다. 역자가 번역서로 사용한 판본은 바로 이것이다.

책의 내용은 리치가 세분하여 번호(number)를 단 그대로, 모두 1000번까지 있다. 이것은 리치가 성경을 비롯한 전통적인 고전서의 양식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한편, 『리치 원전』은 본문과 각주의 비교를 통해 리치의 원저에 페레이라와 트리고가 이미 손을 댔고, 거기에 델리야가 다른 방식으로 손을 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원저자인 리치, 분실된 몇 개의 장(章)을 포르투갈어로 가필한 페레이라, 그것을 그대로 집대성하여 라틴어로 번역하여 유럽으로 가지고 갔던 트리고, 그리고 20세기 초, 이 판본들을 총 정리하여 『리치 원전』으로 소개한 델리야를 통해 본서를 둘러싼 중국학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다. 

각주가 많아 읽기에 불편한 점이 있겠으나 학문적인 관점에서는 오히려 이 점이 더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핵심 저자인 리치와 델리야가 다른 사람의 경험이나 견해를 빌려서 쓴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가 직접 경험하고 느끼고, 연구한 소견을 담은 자료이기 때문에 원문 텍스트에서 읽히는 행간의 의미까지 깊이 있게 통찰할 수가 있다. 

이탈리아인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중국인 리마두(利瑪竇)의 열정과 성실함을 보면서 한 중국인 학자가 『기인십편』(리치 저) 발문에서 한 말, 리치의 말과 삶이 기이하고, 그야말로 “역설을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 여운으로 남았다. 베네딕토 데 고이스의 묘비명 “카타이를 찾다가 하늘을 발견했다”라는 대목에서는 한국교회의 기원이 떠올랐다. 서학, 서양 학문을 찾다가 천학, 그리스도교를 만난 우리의 이야기 말이다.

저자인 리치와 델리야가 쓴 이탈리아어 특유의 만연체 문장을 최대한 우리말의 통사구조에 맞게 옮기려고 노력했다. 가독성을 생각해서 용어를 쉽게 풀어 쓰려고도 노력했다.

 

_옮긴이의 말 中

저자소개

저자 : 마태오 리치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중국명 利瑪竇, 1552-1610)
이탈리아 마르케주 마체라타에서 태어나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했고, 로마로 가서 현(現) 로마대학교 전신인 콜레지움 로마눔에서 당대 최고의 과학자며 교황청 학술원장으로 있던 예수회 소속 아나스타시우스 키르허 교수 밑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예수회에 입회하여 신학을 공부하던 중 아시아 선교사로 발탁되어 고아, 코친을 거쳐 당시 동인도지역 예수회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명으로 아시아선교의 베이스캠프인 마카오에서 중국선교를 준비했다. 중국어와 중국문화에 관한 체계적인 공부를 했고, 중국 내륙으로 파견되어 발리냐노가 수립한 “적응주의 선교정책”을 실천했다.
1610년 5월 11일 북경에서 5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28년간 중국인 리마두로 살았다. 그가 보여 준 삶을 통한 대화의 방식은 ‘긍정적인 타자 형상’으로 각인되었고, 학문을 매개로 한 대화는 동서양 문명의 가교가 되었다. 도덕과 이성, 양심에 초점을 맞춘 인문 서적과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실천학문으로서 과학 기술서의 도입이 그것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유럽에서 꽃을 피운 예술(藝術)도 대화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 덕분에 절벽으로 표현되던 폐쇄적인 중국 사회에서 대화가 가능한 길을 찾아 동서양 화해를 모색한 방법은 역사의 현시성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가 되었다.
번역 : 김혜경
김혜경(金惠卿, 세레나)
로마에서 선교신학을 전공하였다. 가톨릭대, 서강대, 성신여대 등에서 강의했고, 현재 부산가톨릭대 연구교수로 있다. 연구과제와 관련하여, 이탈리아에 머물며 피렌체대학교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2013년 가톨릭학술상 수상), 『인류의 꽃이 된 도시, 피렌체』(2017년 세종우수교양도서), 『모든 길은 로마로』(2024), 『세계평화개념사: 인류의 평화, 그 거대 담론의 역사』(공저: 서울대학교 평화통일연구원 편) 등 전공 및 일반교양 도서가 10여 편 있고,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프란체스코 교황 저), 『바티칸 박물관, 시대를 초월한 감동』(2023) 등 약 20편의 역서가 있다.
「마태오 리치의 적응주의 선교와 서학서 중심의 문서선교의 상관성에 관한 고찰」(『선교신학』 제27집, 2011), 「실천하는 영성가 요한 바오로 2세의 평화의 관점에서 본 가난의 문제」(『인간연구』 제21호, 2011), 「선교사들이 직면한 토착언어 문제: 선교역사를 통해 보는 몇 가지 사례」(『신학전망』, 2015), 「왜란 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본과 조선 인식―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 방문을 중심으로」(『교회사연구』 49호, 2016), 「마태오 리치의 세계지도에 대한 선교신학적 고찰」(『신학전망』 제198호, 2017), 「발리냐노의 덴쇼소년사절단(天正遣欧少年使節)의 유럽 순방과 선교 영향」(『선교신학』 제52집, 2018)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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