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낯선 세상은 없다,
현실은 꿈꾼 세상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다양한 장르, 국적, 인종의 작가들
가장 최신의 클라이파이(Cli-fi)
모든 것이 불탄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세계 각지가 불타고 있다. 어느 곳은 역사상 유례없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수몰됐고, 어느 곳은 사상 최악의 가뭄으로 땅이 갈라졌다. 어느 곳은 폭염에, 어느 곳은 한파에 시달렸다. 기후 위기는 비단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의 소재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중심이 됐다. 이른바 기후 소설(Cli-fi)들은 대체로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잿빛 세상을 그려왔다. 모든 것이 불탄 세상에서도 사랑은, 우정은, 인간적인 가치들은 여전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모든 것이 불탄 세상에서도 인간적인 가치들은 여전할 것인가?’
이는 물론 중요한 질문이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함정이 숨어 있다. 누가 인간인가 하는 함정이.
기후 재앙이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부터 덮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재앙이 덮친 뒤에도 무너지지 않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공존하는가 하는 것이다. 재앙은 결코 미래형이 아니다. 현재진행형이다. 지난여름에 겪었듯이. 지난여름 이전에도 재앙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으나 우리가 직면하기를 잠시 보류했을 뿐이다. 냉난방기가 작동하는 실내에 머물면서.
그렇다, 재앙이 들이닥치고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동안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재앙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따라서 질문은 ‘어떻게’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비단 계급적으로 높고 낮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성별이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성소수자들은, 장애인들은, 노인들은 재앙의 눈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인간 아닌 존재들은?
기후 위기 이후,
디스토피아가 아닌 세상을 상상하는 열두 편의 소설
이 책을 엮은 ‘그리스트’는 기후 솔루션을 강조하고 환경 부조리를 폭로하는 데 전념하는 비영리 독립 미디어 조직이다. 이들은 ‘기후’, ‘정의’, ‘대안’을 모토로 기존 언론 매체의 전통적인 ‘보도’가 아닌 다른 전달 방식을 고민하면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스토리텔링의 힘을 사용하여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길을 비추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며, 기후 변화에 대해 행동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임을 보여준다. 2021년에 시작된 ‘기후소설 세계 공모전’ 〈2200년을 상상하라: 미래의 조상을 위한 기후 소설〉도 그런 실험 중 하나였다.
《우리에게 남은 빛》은 공모전 1회 수상작들을 엮은 책으로, 공모전 제목대로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미래를 상상하는 열두 편의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들의 면면은 굉장히 다양하다. 온갖 장르와 국가, 인종의 작가들은 그들 자신이 그러하듯이 여러 궤도로 교차하는 정체성(흑인, 선주민, 라틴계, 아시아계, 장애인, 난민, 페미니스트, 퀴어 등)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이를테면 〈캔버스, 밀랍, 달〉은 임신 중단을 하는 마녀들의 이야기이고, 〈군락에서 떨어져〉는 카리브해 섬을 덮친 폭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트랜스 소녀들이 산호 사이에서 수용과 안전을 찾는 근사한 이야기다. 한편 첫 번째 작품으로 실린 〈마지막 그린란드 상어의 비밀〉은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네 생물―상어, 바라싱가, 독수리, 인간의 시점이 번갈아 등장하는 아름답고도 쓸쓸한(최후의 존재는 고독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야기다. 〈구름 직공의 노래〉는 가문 곳에서 물을 구하기 위해 거미줄을 짜 이슬을 모으는 이들의 이야기로, 마치 오랜 신화처럼 환상적인 이야기다.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곧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리고 이 제각기 다른 소설들을 하나로 묶는 가장 큰 특징은 뜻밖에도 ‘끈질긴 희망’이다. 아프로퓨처리즘, 호프펑크, 솔라펑크 등의 흐름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이 소설들은 섣부른 절망을 말하지 않는다. 에너지, 기술, 자원 순환, 농업, 사회 정책 등의 측면에서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공동체 유지와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끈기와 용기를 보여주기도 하고, 유토피아라고 생각되는 세계에서 빠지기 쉬운 함정과 디스토피아라고 생각되는 세계에서도 엿보이는 희망을 보여주기도 하고, 인간 너머 다른 생명체들과의 공존을 상상하기도 한다.”(옮긴이의 말)
부족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전쟁을 벌이는 미래가 아닌 공존하는 미래. 이 소설들이 상상하는 미래는 바로 그런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