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연속적인 실재, 가령 어떤 운동의 연속성을 개념에 의해 인식하려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다’나 ‘아니다’에 의해 대답될 물음이 제기되는 것은 언제나 이 연속적인 전개 과정상의 어느 지점(시점) 위에서입니다. 운동의 연속성은 이 지점과 관련해서 성립하는 이러한 ‘이다’와 ‘아니다’의 양분兩分을 언제나 벗어나는 것이지요. 개념에 의한 인식은 그러므로 불연속적인 것으로서, 실재의 연속성을 완전히 표현하는 데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점이 있으니, 그것은 개념에 의한 인식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의한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개념에 의해 인식한다는 것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존의 관념들을 가지고서 실재에 다가가면서, 이 관념들이 짜놓은 틀 중의 어느 것에 들어올 수 있는지를 실재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113쪽)
어떤 사물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은 그것일 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게 됩니다. 모든 생성, 모든 변화가 만약 정말로 비논리적인 것(로고스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며 표현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리고 비논리적이고 표현될 수 없는 것이며 비합리적인 것은 비실재적인 것이라면, 변화나 생성은 실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변화나 생성에 대한 우리의 모든 경험은 한갓 미망이라는 결론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결론이었고 엘레아학파의 결론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논리와 가지성可知性(지성에 의한 이해가능성)을, 그리고 특히 완벽한 표현가능성이라는 것을 발견해 낸 철학자들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즉 절대적인 정확성의 조건이라는 것을 언어 속에서, 그리하여 또한 논리 속에서 발견해 냄으로써, 이러한 발견에 도취되어, 논리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것은, 즉 단순한 논리의 적용에, 정확한 담론의 적용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 내린 철학자들이 도달해 간 결론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변화의 존재를 부정하는 생각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지속이라는 부르는 것, 다시 말해 시간 일반을 부정하는 생각 말입니다. (152쪽)
우리는 시간의 발생을 해명하고 있는『티마이오스』의 몇 안 되는 구절들을 읽고 해설했습니다. 물론 시간의 문제는 플라톤의 철학에서 처음에 보이는 것보다는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데아들에 대한 이론이 일단 한번 구성되고 나면, 그다음에 등장하게 되는 커다란 문제가 바로 어떻게 이데아로부터 사물들로 나아가게 되는 이행이, 즉 영원으로부터 시간으로 나아가게 되는 이행이, 이루어지느냐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해법이 순전히 신화적이기만 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해법은 그저 상징들을 통해서 제시되고 있으며, 플라톤의 철학에서 결코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게 되면 벌써 이 문제는 앞자리를 향하여 나오게 되어, 비록 아직까지도 제일 앞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그렇게 되기까지 목전에 이르렀을 만큼 중요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313쪽-314쪽)
언어든 이데아들 자체든, 여하간에 이러한 것들이 진리의 비장처라는 생각은 명백하게든 암묵적으로든 고대 철학 속에 항상 있었으며, 그러므로 고대 철학 전체 속에서 이처럼 이미 구비되어 있는 것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것들을 물리치는 것으로부터 데카르트는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미 구비되어 있는 관념들 같은 것을 이처럼 물리치고 나서, 데카르트는 그 자리에 무엇을 대체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어떤 행위, 어떤 활동을 그것에 대체하게 됩니다. 그는 이러한 행위 혹은 활동을 진리의 밑천으로 삼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 행위가 가장 근본적인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 행위가 그의 모든 철학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나는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의식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의식은 영원 속에서 초월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의식은 시간적인 어떤 것인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의 사유함을 의식하게 되고 또한 그와 동시에나 자신의 존재함을 의식하게 되는 것은 시간 속에서, 즉 지속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인 것입니다. 자, 바로 이것이 데카르트의 출발점입니다.(509~510쪽)
칸트에게 있어서 시간이라는 것은 공간적인 어떤 것, 공간과 아주 비슷한 어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칸트의 견지에서 보자면, 라이프니츠는 한편으로는 예정 조화의 방법을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즉 실제로 있어야 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끌어들이고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공간과 시간을 한갓 혼잡한 지각일 뿐인 것으로 삼음으로써 이번에는 자신의 밑천이 있어야 할 것보다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순수 논리학과 수학 사이에 있는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공간과 시간에게 어떤 실재성을 부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칸트는 이제 보편적인 기계론을 두 가지 방향에서 동시에 강화할 수 있게 됩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최소한의 공리만을 갖고서, 따라서 가장 안정적인 방식으로, 모든 사물들을 포용할 수 있는 하나의 통합적인 과학의 필연성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공간과 시간에게 어떤 실재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을 통해, 이 하나이고 통합적인 과학이 어떻게 그리고 왜 수학적인 모습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보여 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594~5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