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로 대표되는 일련의 정보 기술 시스템은 오로지 수학적 연산과 수리 논리적 체계에만 기반을 둔다. 컴퓨터라는 명칭 또한 그저 ‘산출(算出, compute)하는 기계’라는 뜻에 불과하다. 이는 우리의 오감 중 몇 개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만큼 자극하든, 정보 기술을 활용해 만들어 낸 모든 결과물은 예외 없이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연산의 산물임을 의미한다. 새로운 창·제작 도구를 찾던 1960년대의 아티스트들은 이 점에 주목했고, 이는 이후 ‘컴퓨터 아트’로 불리는 경향의 단초가 되었다.
01_“정보 기술을 활용한 작품 활동의 짧은 역사” 중에서
지식-기반 시스템 중심 인공지능 연구의 특징과 한계는 외우기나 암기를 중심으로 하는 학습 방식의 그것과 결을 나란히 한다. 그러나 단지 이 점에만 기대어 지식-기반 인공지능 연구의 성과를 평가절하하거나, 외우기와 암기를 창의나 작품 활동과 무관한 것으로 일축하는 접근은 권장할 만하지 않다. 외우기나 암기가 학습과 훈련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것을 통해 축적된 지식이 배움과 앎의, 나아가 창의의 토대를 구성한다는 점 또한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기 때문이다.
02_“백과사전식 데이터베이스와 전시대 인공지능” 중에서
그러나 이를 두고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우열이나 위계를 따지는 접근은 핵심을 빗겨난다. 인공지능과 정보 기술의 기반인 수학과 논리는 인간의 놀라운 직관이나 번뜩이는 영감, 혹은 참신한 독창성 등을 복잡한 숫자나 뜻 모를 기호로 환원하고 해체하여 흩뿌려 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고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수준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그것들을 사상 처음으로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돕는 미증유의 도구다.
03_“인공 신경망과 동시대 인공지능” 중에서
결국 아티스트가 엔지니어링하는 것은 프롬프트가 아니라 스스로의 사유다. 다만 지금까지는 그 과정이 종이나 캔버스 위 혹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눈앞에 놓인 화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다른 어떤 도구들과 마찬가지로, 콘텐츠 생성 인공지능 역시 사유를 표현하는 도구다. 아티스트가 스스로의 사유를 더 정치하고 적확하게 엔지니어링할수록 이 도구는 ‘그가 원하는 바로 그 방식’에 더 가까운 쪽으로 작동하고, ‘그가 원하는 바로 그것’에 더 가까운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06_“생성 인공지능이 작품 활동에서 갖는 의의” 중에서
멀티-모달 개념이 도입되기 이전에는 아티스트가 이 정도로 복합적인 수준의 작업 흐름(workflow)을 갖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소프트웨어는 전용 소프트웨어였고 인공지능도 싱글-모달이 주를 이루었기에, 관련 분야 전반을 넓고 깊게 이해하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창·제작에 필요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또한 다양하게 갖추고 또 활용할 줄 알아야 했다. 필요한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 이를 직접 프로그래밍하거나 제작해야 하는 등 비교적 전문적인 수준의 지식과 역량을 요구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07_“프롬프트가 된 코드” 중에서
멀티-모달 콘텐츠 생성 인공지능의 등장과 활용은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를 해소하고 작품 활동의 탈중심화(脫中心化, decentralisation)를 이끌었다. 복잡한 프로그래밍 언어로 된 코드 대신 인간의 언어로 된 프롬프트를 통해 인공지능과 상호 작용할 수 있게 되면서 창·제작의 진입 장벽이 크게 낮아졌기 때문이다. 소외되었던 관객이 제자리를 되찾고 창·제작자의 역할을 더 능동적인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면서, 기존의 단방향적 흐름이 전방향적(全方向的, omnidirectional) 확산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09_“작가 중심주의를 넘어: 관람과 향유에서 창작과 공유로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