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 선비 장석영의 약 백 일간, 1만 5천 리의 여정
19세기 이후 조선과 대한제국의 혼란은 가속화되었다. 서세동점으로 상징되는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과 청나라의 몰락, 그리고 일본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었다. 동시에 무능한 왕실과 무도한 세도 정치 속에서 탐관의 가혹한 조세 수탈과 자연재해가 이어졌다. 수많은 민중들은 스스로 유민(流民)의 길을 택해 강을 넘기 시작했다. 과거 오랑캐의 땅으로 인식됐던 만주와 러시아 일대가, 기근과 착취로부터 벗어나 삶을 연명할 새로운 터전으로 새로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영남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 회당 장석영은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 2년 뒤인 1912년, 해외 망명을 고려하며 만주와 러시아 일대를 역람했다. 전통 한복과 유관(儒冠)을 착용한 62세의 나이 든 선비가 열차와 두 발만을 이용해 중국의 단둥과 선양, 하얼빈을 지나 러시아 시베리아 일대까지 도합 1만 5천여 리의 길을 몸소 체험하고 돌아왔다.
경계를 살아갔던 이민자들의 역사
장석영이 갖은 고생 끝에 도착한 국경 너머의 현실은 참혹했다. 그곳은 기근과 학정 그리고 식민 지배를 피해 순식간에 몰린 다수의 이민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길에 가득한 것은 부녀자들의 울음과 추위와 굶주림에 고통받는 이산민들의 신음이었다. 더욱이 일제·중화민국·러시아의 치열한 주도권 다툼과 한인 단체들의 내분에 의해, 자칫 생명까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좌기행》은 재외 한인 동포들의 처절하고 치열했던 삶을 생생히 그리는 동시에 식민지라는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전통 지식인의 복잡한 내면을 담고 있다. 한국과 중국, 중국과 러시아의 경계에서 소수자로 살아가야 했던 이민자들을 바라보는 전통 지식인의 다양한 내적 갈등과 자기 정체성의 모색을 수반한 《요좌기행》은 단순한 기행문이 아닌 서세동점이라는 현실 속의 한국 유학사(儒學史), 강제병합에 따른 한국의 독립운동사, 망국으로 인한 한민족의 이민사가 접맥되고 또 교차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