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첫 문장) P.7 진리의 실체는 보거나, 만지거나,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이는 순간, 만져지는 순간, 느끼는 순간 진리는 이미 파괴되어 버린다. 나는 진리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단지, 낯선 말들 뒤에 숨어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 무엇을 종교의 경계 밖으로, 이성의 권력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끄집어내고 싶은 것뿐이다. 이성의 비호를 받고 있는 합리적인 것들, 그것은 진리의 화려하고 견고한 궁궐이다. 하지만 궁궐 밖에는 궁궐과 비교할 수 없이 넓고 끝없이 펼쳐진 우주가 있다. 이 우주는 역설적인 것들이 벌인 축제의 장이다.
P.14 함부로 물려고 덤비지 말라. 물 것을 보고 물어라.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얻어맞을 것이니.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수행자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구나. 그저 자신의 먹잇감을 찾았고 그것과 한 판 싸워 보고자 하는 생각으로 눈만 붉게 충혈 되어 있구나.
P.70 그렇다면,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은 영원히 주인이 아닌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러니 너무 서글퍼하지는 말자. 인간이 주인으로 살 수 있는 건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는 길 뿐이다. 즉 ‘내’ 안에 있는 타자에 대한 갈망 혹은 타자로 설정되는 관계성을 파괴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타자에 관한 ‘나’의 욕망은 타자와의 ‘관계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를 제거한 채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타자로 향하던 ‘욕망’의 방향을 자신 쪽으로 전환하면, ‘나’는 타자의 노예가 되지 않는 동시에 타자의 독립적 존재를 인정하는 수평적 관계성을 유지하게 된다.이럴 때 ‘나’를 대상으로 삼는 ‘나’는 나의 주인이며, 타자도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주인으로 되살아나게 된다.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것은 ‘나’에 대한 진정한 주인의 자리를 되찾은 것이며 동시에 타자와의 견고한 수평적 관계성을 만드는 지름길인 것이다.
P.74 진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마냥 자신의 길을 고집하며 걷고 있는 건 아닌가? 진리 추구의 삶이 온통 ‘주객전도’의 잡풀들로 넘쳐 나는구나. 진리는 간데없고 껍데기만 판치는 세상 때문에 죄 없는 고양이의 목만 잘렸구나.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우리의 삶도 누군가의 목을 비틀게 하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P.86 ‘창과 방패’, 이것의 공존은 오히려 우리를 ‘제대로’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용기이다. 우리가 타자의 방패를 인식하는 한 자신의 창을 함부로 휘두리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방패를 믿는 한 공격하지 못할 어떤 것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 그것이 어떻게 ‘모순’의 다른 이름이 아닐 수 있을까? 양 손에 창과 방패를 들어라.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지속될 수 있으리라.
P.117 내가 안다고 함이 진정 모르는 것이 아닌 줄을 알 수 없듯이, 내가 모른다는 것이 진정 아는 것이 아닌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 밝음이요, 무명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집단이 만든 앎에 용기있게 도전하고, 자신이 만든 앎을 스스로 파괴할 때, 비로소 밝음이 도래할 것이다.
P.131 현대는 현상만 ‘볼 수 있도록’ 은유를 죽이고 모든 존재를 시각적 이미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미지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있을 것이며, ‘어디’ 그 자체가 되고 있다. 우리가 매일 ‘읽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터넷상의 단어들이 대표적인 시각적 이미지이다. 현대인들은 그것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미지화 된 단어들은 인간의 ‘읽기 본능’을 제거하고, 인간들을 ‘보는 것’으로 길들이는 악마이다. 결국 인간의 ‘읽기 능력’은 문명적 진보와 반비례적 관계에 놓인 퇴화된 기관인 반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보는 능력’은 문명 진보의 아이콘이 되고 있다. ‘보는 것’의 즐거움, 그것은 형식 속에서 은유가 사라지는 ‘읽기’의 죽음이다
P.143 말이 많은 현대사회에서 말을 잘 하는 방법은 침묵하는 것이다. 말이 많아지고, 말이 거칠어지고, 말이 분노에 싸여 있다면 그것은 말의 모습을 잃는 것이며 타자에게 도달하기 전에 이미 죽어 버리게 된다.
P. 159 부레는 물고기의 기관 중에서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것 중의 하나이다. 그냥 텅 비어 있는 주머니일 뿐이다. 하지만 ‘바다’라는 그들만의 거친 삶, 그 ‘무거움’을 견디게 만드는 절대적인 것, 그것이 바로 부레다. 인간의 지위와 부가 커질수록 삶의 ‘무게감’은 더 커진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을 가볍게 만들 수 있는 ‘부레’의 크기는 키우지 않는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만든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더 깊은 비극의 바닥으로 가라앉게 된다. 점점 더 늘어나는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르면, 삶은 ‘깊이’의 바닥과 부딪쳐 깨지고 부서지고 만다.
〈사소한 것이 내 삶의 주인이다.〉
P. 181 “아,입이 있었던가?”라는 이 말은 ‘내가 사람들에게 입이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네.’라는 말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오히려 사람들에게는 입이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역설적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입이 없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해졌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행에 있어서 깨달음의 실체 혹은 깨달음의 방편으로서의 무엇을 먹으려 하지 말라는 것, 그런 것을 자신에게 붙이지도 소유하지도 말라는 의미이다. 무의 뿌리는 모두 거짓이거나 환영일 뿐이기 때문이다.
- 〈생각에 뿌리가 생기면, 우리는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다〉
P.188 . 사랑을 하는 것, 그것은 타인에 대한 ‘존중’의 거리를 유지하며 대상을 ‘닮아가는 것’이리라. 이럴 때 사랑의 방향은 순환성을 가지며, 그것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상호 교환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 된다. 별은 밤공기를 닮아가고, 밤공기는 새벽이슬을 닮아가고, 새벽이슬은 꽃을 닮아가고, 꽃은 벌을 닮아가듯 사랑은 흐르고 그 울림은 모두에게 다시 돌아간다. 우리가 별의 빛남을 닮아가는 것은 아마도 지구 반대편의 그 누군가를 존중하는 것이리라.
P.192 만 권의 책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만약, 단어만 ‘보고’ 단어 뒤에 숨은 질문을 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장님이 책을 ‘만지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요, 단어는 오히려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는 장애물이 될 뿐일 것이다. 차라리 책을 버리고, 밤이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달을 보거나, 여름이면 울어대는 매미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나으리라. 그렇게 한다면, 무엇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막힌 귀를 뚫어 주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만 권의 책을 읽는 것만큼 긴 시간이 필요치 않을 것이니.
P.236 우리는 한 번도 정상으로 살아 본 적이 없다. 미쳐 살아가면서도 타인의 눈이 무서워 더 미쳐서 살아갈 뿐이다. 모든 사람들의 눈에는 독이 살아 움직이고, 그 독은 타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런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독을 품고 미친 듯이 대응하는 것밖에. 그래서 모두가 미친 것이다. 모두가 자신들을 정상이라고 말하지만 그 누구도 정상이 아니다. 오직 천재와 바보만이 정상이다. 자신의 의지와 생각대로, 타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만이 정상이다. 우리는 비겁한 미치광이일 뿐이다. 자신의 영혼을 타인의 독기 가득한 시선에 팔아넘겼으니 말이다.
P.240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며 나머지 내가 아는 것도 알고 있으니 모르는 것이 없는 셈이 된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는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살아가고 또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으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진짜 앎의 시작이다〉
P.254 ‘나’를 안다는 것, 그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으리라. 나의 이름으로 ‘나’를 말할 수도 없고 나의 ‘외모’로도 ‘나’를 말할 수 없다. 그럼 무엇으로 ‘나’를 말해야 할까? 과연 말할 수 있기는 한 걸까? 만약,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왜일까? ‘나’도 ‘나’를 모르기 때문이거나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전달할 수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되는 건 아닐까?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존재할 수 있으며, ‘무엇’이 존재해야 하는가? 과연 ‘나’는 ‘존재’ 그 자체인가 ‘존재’의 ‘근거’일 뿐인가?
P.263 현대인들도 그레고르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속’되어 있을 뿐이다. 타인과의 관계적 규율 속에 ‘소속 되는 것’은 ‘나’로서 ‘존재’하는 것에 앞선다. 다시 말해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외쳤던,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을 현대인들은 외로움의 형태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욕망이나 시선의 대상으로서의 ‘나’는 존재할 수 있어도, 나에 대한 ‘나’로서는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 ‘소속된 현대인’의 실존이다. 이렇게 외로움은 타인에게서 시작되고, 그것은 나에게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타인에게 돌아간다.
- 〈우리는 모두가 나그네일 뿐이다〉
P.284 말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말보다 더 깊고 우주보다 넓은 존재들이 온 천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데, 말 혹은 단어, 그것은 나를 그리고 세상을 보여주기에는 먼지보다도 못한, 실체도 없는 초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변에 흩뿌려져 있는 많은 생명들, 아름답게 존재하는 것들을 건져내고 그것들과 시선을 맞추어야 한다. 그것들이 말하는 것에 귀 기울이고, 우리의 입은 침묵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리라. 오늘 아침도 햇살은 창문을 두드리며 나를 깨어나게 하고, 이름 없는 들꽃의 향기는 나의 걱정을 위로하고, 침실의 한 귀퉁이를 적시는 귀뚜라미의 소리는 욕망을 내려놓으라고 다독인다. 친구여 입을 다물자. 그리고 말없이 살아가는 존재들의 리듬을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