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를 만나면 우리의 마음에 군더더기가 없어지고 감정과 욕망을 가리는 가면과 베일을 벗게 된다. 허울 좋은 미덕을 싫어했던 니체가 유일하게 강조하는 미덕은 바로 이 솔직함이다. 그래서 니체는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고생했어. 과거는 잊어. 이제부터는 잘될 거야. 인생 뭐 있어? 힘을 내”와 같은 통상적인 이야기를 건네지 않는다. 그는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를 극복할 수 있는 ‘힘’에 대해 알려줌으로써 우리에게 힘이 된다. 후회에서 벗어나 지금을 열정으로 살아갈 용기를 부여한다.
p. 12 〈처음 만나는 니체 심리학〉 중에서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삶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적당히 눈치껏 행동하며 살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니체가 비판한 ‘사이비 이기주의’이다.
하지만 ‘제대로 이기적인 삶’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렵다. 자기를 이롭게 한다면서 정작 남이 만든 환영을 좇고 있지 않은가? 그건 진실로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다. 우리 대부분이 이기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진정 나다운 삶’을 계속 갈망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p. 16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중에서
니체는 머릿속에서 추상적으로 펼쳐지는 공허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니체의 사상을 실천하려면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성이 아니라 감정으로 시선을 이동해야 한다. 그가 말한 ‘힘’을 마음에서 느끼고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마음으로 극복해야 한다. 단단한 내가 되고자 한다면 자신의 마음을 삶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의지로 가득 찬 이기심을 가져야 한다.
p. 23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중에서
이제 니체를 만났다면 우리를 죄인으로, 우리의 인생을 열등한 것으로 만드는 외부의 구속과 강제에 저항해야 한다. 성과가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 돈을 많이 모으지 못한 것에 대해, 더 노력하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할 수는 있지만, 나 스스로 외부의 기준을 따르며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콤플렉스에 빠질 이유는 없다. 니체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자유로운 영혼이기를 바란다.
p. 44 〈이기주의자는 자책하지 않는다〉 중에서
쇼펜하우어는 내면의 의지를 부정했다. 쇼펜하우어가 도달한 결론은 말하자면 성자와 같은 삶이다. 그는 욕심을 끊고 이타적인 도덕을 실천함으로써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니체는 의지를 부정하지 않았다. 세상의 ‘이기적인 모습’을 더 밀고 나갔고 그것을 긍정해 버렸다. 금욕이 아니라 욕망을 선택했으며 도리어 더 발휘하라고 독려했다. 그 결과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자가 되었고 니체는 힘에의 의지로 긍정의 심리학을 구성하게 되었다.
p. 111 〈행복의 주도권을 남에게 넘기지 말라〉 중에서
니체를 만났다면 이제 싫은 인간은 마음껏 미워해도 된다. 양심의 가책? 니체의 심리학에서 배제되는 언어가 바로 양심이다. 선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니체가 선한 마음에 우월한 가치를 부여했을 리 없다. 그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감정을 억누르면 정신병에 걸린다고 경고했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미운 사람은 미워하는 편이 낫다.
p. 161 〈제대로 미워하고 인생의 활력을 얻어라〉 중에서
‘쾌감과 고통은 쌍둥이’라고 말한 감정에 대한 니체의 발견은 그의 영원회귀 사상과 이렇게 맞닿는다. 두 감정은 같이 태어나고 서로에게 의존하며 번갈아 나타난다. 이 사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감정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컨트롤할 것이다. 절망을 느낄 때 막연히 희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즉각적으로 희망을 씨앗의 바라보며 이것을 현실화할 것이다.
p. 213 〈절망을 딛고 자기 자신으로 우뚝 서라〉 중에서
니체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을 별 볼 일 없는 곳으로 전락시키고, 나중의 영광을 위해 지금을 허접하게 만드는 플라톤의 사고방식을 혐오했다. 플라토닉하게 살고 싶은가, 아니면 니체스럽게 살고 싶은가. 서양철학의 역사는 플라톤의 사유에 대해 떠들어 댄 이야기일 뿐이라고 한 후대의 평가처럼 이데아와 현실 세계를 나누는 플라톤의 이분법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사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니체는 그 이분법의 구도를 역전시키려 했으니 그때까지 이어져 온 서양철학의 기본 질서를 뒤흔든 시도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니체는 우리가 이데아라는 목표에 종속되면 자유를 잃고 노예 같은 삶을 살게 될 수 있다면서 우리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이데아에 속지 말고, 나중이라는 말에 속지 말라고. 그리고 부디 지금과 여기에 집중하며 즐겁게 살라고.
p. 247 〈당신이 믿어온 삶의 목적을 의심하라〉 중에서
니체가 거부하는 슬픔의 정서는 고통과 절망이 아니라 무기력이다. 니체에게서 고통과 절망은 미래지향적이다. 그것들을 딛고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후회’는 과거지향적이어서 아무런 발전 가능성도 주지 않고 결국 무기력으로 귀결된다. 니체는 후회와 같은 감정을 극복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사진에서는 그토록 우울해 보이는 니체가 즐거움과 재미를 추구했다니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즐거움이 없으면 삶도 없다”면서 우리가 즐거움을 향한 ‘투쟁’을 해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영원회귀의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비웃으라고 한 그다. 니체에게 웃음은 삶을 극복하는 수단이었다.
그렇다면 즐거움을 미뤄서는 안 된다. ‘곧 환경이 바뀔 거야’ ‘곧 원하던 바가 이뤄질 거야’라고 말하며 즐거움을 유예하지 말자.
p. 263 〈승리의 에너지로 춤추듯 살고 사랑하라〉 중에서
오늘날 니체가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이유는 니체만큼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것을 전복하도록 안내한 철학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악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그의 말이 모든 것을 대변한다. “너는 틀렸어, 잘못됐어, 나빠, 문제가 있어”와 같이 우리를 위축시키는 모든 말들은 니체 철학 앞에서 완전히 무력해진다.
또 니체처럼 우리의 욕망을 긍정해 준 철학자 또한 일찍이 없었다. 니체처럼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철학자 역시 없었다. 니체처럼 우리의 신체적인 결함과 문제점을 가려주고 그럼에도 초인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해 준 철학자도 없었다. 니체처럼 알량한 이성의 능력보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정, 감정, 열정, 쾌감이 더 중요하다면서 절망 가운데서도 춤을 추라고 말한 철학자는 없었다. 심지어 꿈을 강요하는 이 시대에 “나는 미래의 무지를 사랑한다”면서 꿈이 없어도 괜찮다고 말해준다.
p. 281 〈이제 니체를 실현할 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