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가장 본질적이고 무해한 감정인 ‘슬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 ‘서투름’, 가장 중요한 주제인 ‘사소함, 익숙함, 하찮음’의 힘. 세상의 모든 이들이 부디 이 힘을 깨닫고 ‘작지 않은 것, 소중하고 귀한 것’으로 곁에 두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습니다. 쉥크의 어미 양과 함께 슬퍼해주기를, 야코비데스의 아이들 그림 앞에서 함께 미소를 지어주기를, 페르메이르의 우유 따르는 여인과 그녀의 앞치마를 오래 바라봐주기를 바랍니다._7~8쪽
사람들은 대체로 ‘먹물’이라 불리는 식자들의 외양을 허여멀건 하고 부드러울 것으로 생각하지만, 진정한 먹물들 은 그랬을 리 없다는 걸 나는 플라톤의 《국가》 같은 책을 보면서 느낀다. 이렇게 벽돌처럼 두꺼운 책을 쓰려면 웬만한 체력으로는 어려웠을 거라고. 홉스가 아무리 근대성에 관한 놀라운 통찰을 해냈어도, 보부아르가 아무리 인간 존재와 여성에 관한 날카로운 영감을 건져 올렸어도, 엉덩이 붙이고 앉아 글로 쓰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들을 철학자로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철학도 결국 몸으로 하는 일이다._20쪽
솔직히 처음에는 보고도 몰랐다. 그림 속 비너스에 복근이 있다는 사실을. 부드럽고 동글동글한 선이 부각된 몸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조용해 보이는 부드러운 여인, 자의로든 타의로든 당대의 정숙 이데올로기까지 장착한 비너스에게 복근이 있다는 사실이 나는 지금도 재밌다. 관념적으로 이상화된 여성의 신체에도 원래부터 단단한 근육이 있었다는 메시지로 해석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_34쪽
아직 보지 못한 올리브 숲은 정말 보티첼리의 그림에서처럼 금빛으로 빛나는지, 그 숲의 냄새는 어떤지 느껴보고. 이 세계가 숨기고 있는 신비를 하나씩 찾아내어 껍질을 벗기고 속살을 드러내는 기쁨을 누릴수록 삶은 풍요롭고 충만해질 것이다. 몸속에서 몰랐던 근육을 찾아내듯 하나씩 새로운 것을 만나는 삶. 익숙함 속에서도 낯선 감각을 깨우는 은은한 도전.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는 최선을 다해 동사로 살아갈 근육이 필요하다._43~44쪽
아테나 신을 섬기며 독신 서약을 했던 메두사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을 모두 거절했지만, 그 거부가 포세이돈의 욕망을 부추겼다. 이에 엄청난 모욕감과 질투를 느낀 아테나는 저주를 내려 메두사를 괴물로 만들고, 특히나 아름답다고 칭송받던 그녀의 머리카락을 뱀으로 만들어 버렸다. 강간 피해자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어 고통받은 고전적인 사례다.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메두사는 피해자다. 강간 피해자이거나, 고래들의 치정 싸움에 등 터진 엉뚱한 희생양이거나, 그저 연인을 사랑한 죄로 혼자 엄청난 형벌을 뒤집어쓴 피해자다._54쪽
한쪽이 위협으로 느끼는 존재는 다른 쪽에게는 힘이 되는 법이다. 남성들을 돌로 만들어 무력화시키는 메두사의 강한 힘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분노가 강렬한 에너지로 표출되는 모습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메두사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들으려 했던 사람들에 의해, 그녀는 이제 강하고 분노할 줄 알며 쉽게 굽히지 않는 여성의 이미지를 얻고 있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로고로도 등장할 만큼 자신의 매력을 뚜렷이 각인 시킨 메두사의 눈을, 있는 그대로 차분히 응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_63쪽
반사는 현재다. 반영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아우른다. 앞서 말한 반영의 시간성이란 그런 것이다. 하디의 소녀는 예전의 나처럼 거울을 바라보고, 뭉크의 여인은 지금의 나처럼 거울을 마주한다. 나는 이제 거울 속에서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만나보곤 한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이 자부심의 표출이고 파울라 모더존-베커의 자화상이 여성의 시선으로 그린 여성성이라면, 뭉크의 자화상은 영혼의 고백이다. 뭉크 연구자들은 그가 수많은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집요하게 따라다녔던 죽음의 공포와 생의 불안을 직시하며 생을 헤쳐 나갔다고 말한다._94쪽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순간. 그런 카이로스적인 순간은 엄청난 돈을 들여야만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간 곳에서 (어디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나무 밑에 들어가 위를 올려다보며 가만히 서 있던 순간을 강렬하게 기억한다. 잎이 무성하고 가지가 마치 우산살처럼 동그랗게 내려앉은 나무였는데, 그 안에서 위를 올려다보니 꼭 어떤 결계를 뚫고 다른 차원으로 입장한 것 같은 낯설고 황홀한 공간감이 느껴졌다. 나뭇가지들은 마치 혈관처럼 퍼져 있는 생명의 길 같았다. 그 안에서 나무의 부드러운 몸짓을 보던 순간이 나의 카이로스적 순간이다._105쪽
인간은 본질적으로 슬픈 존재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안의 어린 고양이도 말한다. 무사태평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슬픈 소리가 난다고. 그러므로 그 슬픈 소리를 듣고, 어디에서 울음소리가 나는지 묻고, 다정하게 어루만져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서로에게 기댄 ‘사람 인(人)’의 모양처럼, 서로에게 몸과 귀를 기울이고 어깨를 빌려주며 버티게 해줄 존재가. 고통은 작은 것도 큰 것도 가벼운 것도 무거운 것도 없이 모두 그저 아픈 것이다. 곁에 있는 이들이 그 아픔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어도,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줄 수는 있다._145~146쪽
사실 슬픔은 약함이 아니라 강함이다. 차가움이 아니라 따뜻함이다. 보잘것없는 감정이 아니라 위대한 감정이다. 모든 슬픔이 강함은 아닐지라도, 슬픔과 약함보다는 슬픔과 강함 사이의 연결통로가 훨씬 많고 단단하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깊이 이해하는 순간은 상대의 행복에 공감하는 순간이 아니라, 상대의 슬픔에 공명하는 순간이다. 슬픔을 맑게 간직하고, 세상을 씻는 눈물로 잘 울어줄 수 있는 딸들이 되면 좋겠다. 아들들도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울고 아파하며 함께 세상을 위로해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세상의 그늘을 읽고 서로의 슬픔을 바라보며 사람으로 살 수 있으면, 슬픔은 기쁠 것이다._162~163쪽
사소하고 하찮지만 부끄러울 것 없는 삶. 인류가 걷는 길에 소소하게 작은 점을 쌓는 삶. 앞서 언급했듯이 세상의 사소함은 모두 반어법일지도 모른다. 시를 읽고 안에 든 반어법을 알아보는 사람에게 시의 의미가 깊이 닿아오듯, 사소함 안의 커다란 것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의미가 다르게 닿아올 것이다. 주변에 그렇게 있어주었던 평범하고 익숙한 사람들에 대한 마음가짐도 그렇게 사소하게 달라지면 좋겠다._219쪽
세상에는 ‘정’과 ‘반’만 있는 게 아니라, 둘이 만나 어딘가에서 생겨나는 ‘합’이 있음을 믿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다. 쓸데없이 갇히지도 가두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경쾌한 직구도, 묵직한 커브볼도 다 멋있다. 부드럽게 직선으로 닿아가는 것도 멋있지 않은가. 다시 말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서투르게 재단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10만 개만 있는 게 아니라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점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의 점이면서 점의 원리를 가끔 망각하는 인간들이다._253쪽
끝이 새로운 시작이 되듯이, 뒤는 새로운 앞이 된다. 우리 삶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흐름이지 단계별로 단절된 시간들이 아니듯, 우리는 봄에서 여름을 보고, 여름에서 또 가을을 본다. 모든 계절은 무 자르듯 토막토막 잘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드랍게 포개 안고 있다. 봄꽃 향기 속에서 문득 여름의 태양 냄새가 느껴지고, 여름날 장대비 속에서 볼을 빨갛게 하고 있는 나뭇잎 하나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_288쪽
니체는 도덕적인 현상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현상에 대한 도덕적인 해석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나는 이런 유의 사고방식이 앞과 뒤의 관계를 보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은 기회를 놓친 것 같고 순서가 다 지나버린 것 같더라도, 무엇을 앞으로 놓고 무엇을 뒤로할지는 세상이 정한다기보다 삶의 흐름 속에서 내가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_289~290쪽
사실 인간 내면에서 불과 얼음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마음을 불로 지지면 희한하게도 얼음이 생성되는 경우가 많
다. 사랑에 크게 덴 사람이 한없이 냉정해지듯이. 그러나 그 얼음이 다시 불을 만나면 어쩔 줄 모르고 녹아 눈물이 되기도 한다. 사랑이 얼음을 만들고, 또 사랑이 얼음을 녹인다는 그 희한한 진리. 우리는 그렇게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가진 것들을 버리고 마음에 있는 것을 비운다._3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