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도 언덕도, 눈으로 덮여 평평해졌다. 현명한 이들은 덧창이며 문을 굳게 닫아걸고, 그 사이사이 눈보라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파고들 만한 틈까지 전부 막아놓은 채 집 안에 틀어박혔다. 첫눈, 첫 얼음. 캐드펠은 마지막 기도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감사의 말을 중얼거렸다. 허워드 수사와 그의 동료들은 멀리 떨어진 고향을 향해 출발한 지 이미 오래였으니, 아주 잠시만 이런 날씨를 견디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곳과 우스터 사이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채 헤매고 있을 에르미나 위고냉과 이브 위고냉,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용감하게 보호자를 자처하여 길을 따라나선 젊은 베네딕토회의 수녀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 34~35쪽
그 창백한 물체는 환상이 아니었다. 그는 얼음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저 너머에서 꼼짝 않는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목덜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 잠시 그것이 새끼 양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양보다 길고, 매끈하고, 늘씬하고, 희었다. 유리처럼 번쩍이는 얼음 너머, 창백하고 갸름한 얼굴의 커다랗게 뜬 두 눈이 똑바로 그를 보고 있었다. 작고 섬세한 손은 마치 항의라도 하듯 옆구리 위쪽으로 약간 올라가 있었다. 몸 전체가 희었고, 유일하게 걸치고 있는 속옷 역시 희었다. 속옷은 찢겨 있었다. 그녀의 가슴 부근에서 흙빛 얼룩을 언뜻 본 듯했지만, 열심히 들여다볼수록 그 얼룩은 차츰 형태를 바꾸더니 마침내 뿌옇게 흐려지고 말았다. 얼굴은 연약하고 섬세하고 어렸다.
--- 76쪽
순간 엘리어스 수사가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그 소리는 여전히 작아 덧창을 뒤흔드는 바람 소리에 이내 묻혀버렸다. 그는 뼈만 남은 두 손을 움켜쥐더니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리쳤다. “죽었다고? 그분이 죽었다고? 그 젊은 나이에,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나를 믿었는데! 죽었다니! 아아, 이 집의 돌이여, 내 위로 무너져 나를 덮어다오! 이럴 수는 없어! 사람들이 나를 보지 못하도록 제발 나를 묻어다오!” 반도 채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엘리어스의 말은 마구 뒤엉킨 채 격렬히 쏟아져 나왔다. 이브는 깜짝 놀라 잠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서 있다가, 자기가 악의 없이 불러일으킨 그 격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 153~154쪽
그는 혼자였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 내내 곁에 있었는데…… 그는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아이 하나가 악착같이 따라왔었어. 그 아이가 내 몸 위에 건초를 덮어주고, 곁에 누워 따뜻하게 해줬지.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엘리어스는 그 소년이 그리웠다. 그들 두 사람은 더없이 친밀하게 서로에게 매달려 눈보라 속을 걸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이겨내고자 한 것은 추위나 비정한 바람만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몰라도, 그는 그 소년을 찾아내야 했다. 소년에게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
--- 211쪽
300걸음도 채 가기 전에 핏자국이 발밑에 나타났고, 루비처럼 붉은 조그마한 자국이 점처럼 이어졌다. 잠시 후에는 두 번째 핏자국이 보였다. 그 너머에도 작은 점은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 아주 작긴 하지만 얼룩은 얼어붙은 눈 위에 너무도 또렷히 남아 있었다. 아직 한낮의 햇빛이 힘을 잃기 전, 그렇게 나아가던 두 사람은 마침내 험상궂은 클레의 형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늑대들에게 어울릴 만한, 너무도 황량하고 쓸쓸한 곳이었다.
--- 226쪽
뺨과 턱에 끈적끈적하게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면서도, 이브는 쓰러진 사내 너머 이쪽을 주시하는 남자에게서 한순간도 경탄의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희미한 별빛 아래 새하얀 치아가 번득였고, 밝은 눈동자는 마치 보석처럼 빛났다. 부드러운 물결 같은 검은 머리칼이 두툼한 모자 밑으로 빠져나와 젖혀진 망토 옆에서 넘실거렸다. 단정하고 강인해 보이는 두상은 물론 몸의 모든 선과 움직일 때의 동작 하나하나가 남자의 젊음과 대담성을 드러내는 듯했다. 정신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에게 매료되었다. 전에도 소년에게는 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영웅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영웅은 젊고 새로웠으며, 무엇보다 지금 바로 여기, 그의 곁에 있었다.
--- 267쪽
이보다 적절한 조언이 있을까. 그녀에겐 마치 저 밖에서 다가오는 해빙기와도 같은 말이리라. 에르미나는 꽃이 피어나듯 환한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죄의식과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한 모든 슬픔이 녹아 사라지면서 캐드펠의 눈을 황홀하게 했던 광휘가 되살아났다. 죽음과 과거를 등진 채, 그녀는 삶과 미래를 향해 열렬히 돌아서는 참이었다. 이번만큼은 실수가 아니라고, 캐드펠은 생각했다. 어떠한 권력도 그녀를 이 헌신적인 사랑으로부터 등 돌리게 할 수는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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