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속으로
왜 위험하기까지 한 어떤 생각은 철학이 되었을까요? 그 생각들은 철학자들이 흔히 하는 말로 ‘이성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이르게 된 결론입니다. 물론 철학에는 ‘정설’이나 ‘다수설’ 같은 게 없고, 어떤 주장이든 끊임없이 비판의 대상이 되므로 그런 비상식적 주장도 상식에 근거해 다시 비판받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철학적 사고 과정을 따라가 보는 것 자체가 철학적 토의에 직접 참여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처럼 ‘이성이 이끄는 대로’ 생각하다 보면 철학자들이 내놓은 생각에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럼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겁니다. -12~13쪽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철학에서는 나름 합리적이라고 제시했던 근거도 의심스러우면 얼마든지 비판하고 새로운 주장을 제시합니다. 세상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탈레스의 주장도 그렇습니다. 탈레스의 뒤를 이은 후배 철학자들인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도 이 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지 각자 말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해서 밀레투스학파라고 부릅니다. 물론 탈레스의 주장이 현대 과학의 시각에서 보면 틀린 말이듯 그들의 주장도 틀렸습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맞는 말이냐 틀린 말이냐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근원을 묻기 시작했다는 점, 신화적인 방법이 아니라 합리적 방법으로 그 대답을 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철학을 처음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36쪽
대중매체 속의 좀비는 그저 재미를 위해 만든 상상의 산물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시체가 부활하여 움직인다는 것은 현대 과학에 어긋나며, 혹시 그렇게 움직인다면 그것은 시체가 아니니, 비과학적인 것을 신봉하는 오컬트주의자나 좀비를 진지하게 생각하겠죠. 만에 하나 그런 좀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좀비임을 금방 눈치챕니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어떻게 그런 좀비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하고, 더구나 겉으로는 우리와 구분되지 않는다고까지 말할까요? 이성에 따른다는 철학자가 오컬트 마니아처럼 현대 과학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는 걸까요? 부두교에서는 부활과 같은 종교적인 의미를 위해 좀비를 상상하고, 영화 제작자들이야 재미를 위해 좀비를 만든다고 하지만, 철학자들은 왜 좀비를 상상할까요? -71쪽
내일도 해가 떠오른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우리한테 주어진 정보는 지금까지 매일 해가 떠올랐다는 사실뿐입니다. 물론 하루 이틀이 아니라 지구가 생긴 이후로 수십억 년 곱하기 365일 떠올랐다는 지식을 전제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전제에서 내일 해도 떠오를 것이라는 결론을 확실히 내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아무리 여러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지식일 뿐이고 미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아닙니다. 미래의 일은 일어나기 전에는 전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물론 내일 아침이 되면 아마 해가 떠오를 테고 우리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제 미래의 지식이 아닙니다. 이미 과거의 지식인 거죠. 우리는 내일도 해가 떠오를 것이라는 지식을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습니다. -129~130쪽
우리가 따라야 하는 도덕적 의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켜야 하는 것이지, 무슨 무슨 사정이 허락하는 한에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거짓말을 하지 마라.”가 의무라면 무조건 지켜야지, “분명히 나쁜 결과가 생길 때가 아니라면 거짓말을 하지 마라.”는 식으로 조건을 붙이면 안 됩니다. 칸트는 전자와 같은 명령을 정언명령이라고 부르고 후자와 같은 명령은 가언명령이라고 부르며, 도덕적 의무는 정언명령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언명령이 허용된다면 사람들은 갖가지 핑계를 갖다 붙여 자기에게 유리한 명령을 만들지 않을까요? 칸트가 걱정한 것은 사람들의 그런 합리화 아니었을까요? -178쪽
노력도 선천적인 요소가 상당히 강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부지런하게 태어난 사람도 있고, 게으르게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동물을 보세요. 나무늘보처럼 1미터 움직이는 데 몇 분씩 걸리는 게으른 동물도 있고, 너무 바빠서 슬퍼할 틈조차 없는 벌꿀, 아니 꿀벌 같은 동물도 있는데 부지런하거나 게으르거나 하는 것도 천성 아닌가요? 사람도 그렇게 부지런하고 게으른 정도가 태어날 때부터 다 다릅니다. 그리고 비슷비슷하게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역시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노력하는 정도도 강화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합니다. 노력의 모범을 보이면서 자꾸 북돋워 주는 집도 있지만 만사에 태평한 집도 있으니까요. 결국 운이 아닌 게 뭐가 있나요? 로또도, 외모도, 출신 집안도, 실력도, 노력도 모두 운에 좌우되는 것 아닌가요? -195쪽
불행한 사고가 난 지성인의 사례와 비슷한 예로 ‘더 좋은 시대에 태어났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태어난 갑순이는 그 시대 여자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시집가서 남편과 아이들 뒤치다꺼리만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알았고, 그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갑순이는 시 쓰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습니다. 갑순이는 죽기까지 자신이 그 재능을 살리지 못한 것도 몰랐습니다. 만약 현대에 태어났다면 교육도 제대로 받고 재능도 계발하여 훌륭한 시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현대에 태어나지 못한 것이 갑순이에게는 큰 불행이고 나쁜 일입니다. 갑순이는 비록 그 나쁜 일을 느끼지 못하지만, 다시 말해서 에피쿠로스의 동시성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갑순이에게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바보와 소크라테스를 비교하는 경우처럼 시인으로서의 삶이 전통 사회의 여성으로 사는 삶보다 꼭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248쪽
최근의 채식 또는 동물권의 트렌드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윤리적 육식’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것이야말로 형용 모순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다이어트나 종교적 이유로 채식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채식주의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윤리적 동기의 채식주의를 떠올립니다. 동물의 권리를 존중할 때 채식이 실천적 귀결로 도출되는 것으로 아는데, 윤리적 육식이라니? 육식이 어떻게 윤리적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둥근 삼각형만큼이나 그 자체로 모순적이지 않습니까? 엄격한 윤리적 채식주의자라면 윤리적 육식이 가능하다는 것은 ‘윤리적 살인’이 가능하다는 주장만큼 터무니없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 3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