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커피 노동자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커피밭 사람들이 돌아왔다! ‘몬타냐’와 함께
2001년, 박사학위 청구 논문을 쓰려고 어떤 소속도, 아는 사람도 없는 코스타리카로 혈혈단신 떠난 이가 있다. 바로 ‘몬타냐’ 림수진! (몬타냐는 저자가 코스타리카에서 사용하는 이름으로, ‘산’을 뜻하는데, 이 이름에 얽힌 웃지 못할 사연은 책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변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우여곡절 끝에 코스타리카 하고도 타라수라는 낯선 곳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커피밭 사람들’. 그러고 나서 그는 『커피밭 사람들』(2011)이라는 책을 통해 거대이론이나 통계 저 바깥으로 까마득히 밀려나 있던 커피밭 사람들의 굴곡 많은 삶과 엘레나, 기예르모, 프레디, 안토니아…라는 이름들을 세상으로 불러냈다.
숙련도는 고사하고 체력조차 받쳐 주지 않는 ‘불량노동자 몬타냐’였던 림수진. 그는 통계나 설문, 이론을 전혀 차용하지 않은 논문을 써 보겠다는 야심(!)에 차 무작정 커피밭으로 뛰어들어 커피밭을 삶의 근거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과 부대꼈다. 그들의 삶을 엿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동안 자신이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지 몹시 불안해하면서도 시간의 흐름을 믿으며, 설령 망하더라도 잃을 게 별로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망해 봐야 기껏 2~3년 정도 인생길을 에둘러 가는 거야. 죽지 않고 살면 돼. 죽지 않고 살아 낸다면 그게 내가 가야 할 길이야’라고 생각하며 커피밭 사람들의 삶을 기록해 나갔다.
코스타리카 커피밭의 불량노동자 몬타냐,
그가 기록한 커피밭 사람들의 20년 삶의 궤적!
처음에 림수진은 짧으면 1년, 길어야 2년이면 자신이 계획했던 일이 마무리될 거라 여겼다. 커피밭 사람들이 자신에게 선뜻 손 내밀어 주었을 때도 그는 그들의 삶을 살짝 엿보고 빠져나오려는 얄팍한 계산을 했다. ‘논문 쓸 만큼의 자료가 얼추 모이면 다시 여기 올 일이 없을 거야!’ 그러나 림수진은 그들의 이야기를 논문에 싣지 못했다. 논문에 쓰지 못한 이야기들이 모여 『커피밭 사람들』이 나왔다. 그리고 20년 넘게 커피밭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세상의 막장이라 불릴 만한 커피밭에서 림수진, 아니 몬타냐는 일을 잘하지도, 몸이 여물지도 못한 불량노동자였다. 그런 몬타냐를 위해 커피밭 사람들은 소박하나마 자신들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음식과 잠자리는 물론 자신들의 삶까지. 그리고 불량노동자 몬타냐가 해고될까 봐 수시로 전전긍긍 자기 일처럼 걱정했다. 림수진은 그들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나는 잠시만 있다가 돌아갈 사람이야. 내가 돌아갈 곳은 이곳 커피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풍요롭고 깨끗하고 안전한 곳이야. 이 고단한 삶은 잠시 잠깐의 각본에 의한 것이야”라고 그들에게 쉽게 고백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신뢰가 쌓였을 때 몇 번 사실대로 얘기했지만 그들은 도통 몬타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때마다 그의 마음에 빚이 쌓였다. 그들에게 좋은 밥 한 끼를 대접할 기회를 엿봤지만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들은 떠돌이였다. 정들만 하면 헤어지기 일쑤였다. 힘들게 다시 만나더라도 금세 헤어져야 했다.
그래서 림수진은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썼다.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고, 더하여 세상이 그들을 좀 알아줬으면 해서, 그리하여 커피가 이토록 극진한 대접을 받는 세상에서 그들의 삶도 그랬으면 해서, 계속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써 나가다 보면 세상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친절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커피에 대한 온갖 글이 넘쳐 나지만
커피 따는 사람들 이야기는 여전히 드문 세상
그런데 웬걸 갈수록 빚이 늘었다. 아무 때고 불쑥 찾아드는 몬타냐를 그때 그 커피밭 사람들이 한결같이 받아 주었다. 한없이 시린 삶을 살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몬타냐를 걱정하고 위로해 준다. 빚 갚자고 시작한 일인데 그들과 만날수록 빚이 는다. 그래서 림수진은 고백한다. 기왕 20년을 만나 왔으니 죽을 때까지 그들을 만나야 할 것 같다고. 신이 자신에게 허락하는 시간까지, 그리고 신이 그들에게 허락하는 그 시간까지.
커피에 관한 글들이 쏟아지고 넘쳐 난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커피의 역사부터 커피 재배법, 원두의 종류, 원두를 음료로 만드는 법, 실내 장식이 훌륭한 커피숍에 이르기까지 커피와 관련한 이야기는 무궁무진이다. 그런데 정작 커피 따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거의 없는 듯하다. 수확한 커피를 음료로 마실 수 있게 되기까지 엄청나게 먼 거리를 이동하고 숱한 공정을 거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글에 등장하는 커피밭 사람들은 커피를 둘러싼 모든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코스타리카 커피밭에서 림수진이 만났던 사람들. 누군가는 커피밭의 주인이었고 누군가는 커피밭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누군가는 코스타리카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고 누군가는 니카라과에서 코스타리카로 계절 이주해 커피를 따는 사람이었다. 파나마 북쪽 국경 산악지대에서 코스타리카로 이주해 온 사람도 있었다. 2001년부터 2024년까지 이어지는 이야기 속 사람들의 삶은 무척 다양하다. 한곳에 정주하여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불법 이주노동자로 각처를 떠도는 이들도 있다. 최근처럼 SNS가 활성화되기 전까지 그들을 찾는 일이란 그야말로 망망대해에서 낚싯대 하나를 드리우고 하염없이 고기를 기다리는 일과 다름없었다. 그래도 기다리는 시간이 마냥 헛되지만은 않았다. 기다림의 길목에서 또 다른 ‘커피밭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삶으로부터 이야기는 다시 가지를 쳤다.
『커피밭 사람들』에 등장했던 이들 중 대부분은 이제 더 이상 커피밭에서 일하지 않는다. 하지만 림수진이 커피밭 사람들에 대한 마음의 빚을 청산하지 못하는 한 그들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들 다음 세대의 삶이 어떻게 펼쳐지는지는 계속 기록될 것이다.
우리의 삶과 커피밭 사람들의 삶은
분명히 이어져 있다!
지리학을 공부하고 지역 연구로 쓴 책이니 『커피밭 사람들, 그 후 20년』은 학술서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에 관심을 가진 한 연구자가 지난 24년간 커피밭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기록한 삶의 글이니, 대중서이기도 하다. 커피 혹은 라틴아메리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뿐 아니라 지역 연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커피를 마시는 일이 우리 삶의 너무나 흔한 일상이 되어 버린 지금, 이 책은 커피의 이면을 다시 한번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한 잔 커피 값을 100분위로 나누었을 때 가장 적은 파이를 가져가는 커피밭 사람들. 그들이 가져가는 몫은 소수점 아래, 0으로 숫자가 한참 이어진 뒤에 겨우 드러난다. 그러니 사실, 의미 없는 숫자다. 그럼에도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이유는 우리가 마시는 커피 한 잔에 그들의 삶이 눅진하게 녹아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산에서 유통까지 커피산업에 종사하는 이들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통계나 거대이론이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는 ‘커피밭 사람들’. 이 세상에서 커피를 마시는 일은 분명 그들의 땀과 눈물, 웃음과 외로움을 같이 마시는 일이다.
책에 나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숱한’ 커피밭 사람 중 한 사람일 뿐이다. 대부분은 이제 더 이상 커피 따는 일을 하지 않지만, 그들의 오늘은 그들이 커피를 따던 오래전 그 시절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공정 거래’ 커피가 등장하고 ‘지속 가능한 커피’가 언급되지만 그런 장치나 이론은 이들의 삶에 미치지 못한다. 땅 한 평 갖지 못한 채 불법 이주자로 커피밭을 전전하는 이들은 세계 커피산업에서 보이지 않는, 아니 보이지 않아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세상에 그들의 존재를 좀 더 알릴 수 있다면, 그리하여 한 번이라도 더 그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드러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림수진은 생각한다. 개인들의 이야기이지만 이 세상 커피밭에서 삶을 이어 가고 있는, 언젠가 삶을 이어 갔던 ‘숱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어 주면 고맙겠다고 말한다. 우리의 삶이 그들의 삶과 분명히 이어져 있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