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모든 시는 ‘전주곡’이나 ‘소묘’인 채로 태어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적어도 시를 쓰는 마음의 첫 자리는 웅장한 교향곡이나 거대한 풍경화의 완성된 세계를 모르기 쉬울 듯하다. 시인은 마주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를 울리는 하나의 동기 음(音), 폐부를 찔러오는 희미하고 가냘픈 한 줄의 선을 얻기 위해 골몰하며 거기서 세상과 그 자신을 되비추는 소리와 이미지의 작디작은 어울림의 움직임, 모순과 파열의 이야기가 일어나기를 갈망하는 것이리라. 또한 시 한 편의 완결은 시인이 꿈꾸는 시의 전체적 영토 안에서라면 언제나 잠정적이고 예비적인 자리로 물러나며 지속적으로 열려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모든 시는 본편을 유예하며 기다리는 서시일 수밖에 없다. 장석은 시집을 여는 「서곡—모든 서시 앞에」에서 시의 이러한 운명을 노래한다.
내 모든 시는 서시로 태어나길
기쁨의 전주곡이고
슬픔의 만가이길
도망쳐 달아나는 시간을 쫓다가
당신의 마지막 노래로 불리길
—전문
그런데 시인이 확인하는 ‘서시’의 운명은 이어지는 두 연에서 ‘기쁨의 전주곡’과 ‘슬픔의 만가’를 거쳐 ‘마지막 노래’의 자리를 소망한다. ‘마지막 노래’는 ‘전주곡’과 ‘만가’가 기쁨과 슬픔의 변경과 언저리를 자처하는 것만큼, 후위의 묵묵한 노동과 고적(孤寂)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여기에 과묵한 대로 ‘마지막’이 갖는 영예의 후광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서시의 숨겨진 욕망이라 하더라도 존중받아 마땅하다. 관대함은 시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 ‘시간을 쫓다가’ 끝날 수밖에 없는 유한성의 수긍으로부터, 결핍과 부재를 감내하는 시의 본원적 아이러니로부터 생겨나는 것일 테다.
물론 ‘전주곡’이나 ‘소묘’를 제목으로 특정한 연작의 시적 좌표를 그 자체로 살펴보는 일도 필요하다. ‘열여덟 개의 전주곡’ 연작은 장석 시의 원천이기도 한 ‘바다’의 한순간 한순간을 그리고 있고, ‘목탄 소묘집’ 연작은 중부 유럽의 다뉴브강을 따라간 여로의 순간들을 담고 있다. ‘전주곡-소묘’가 말 그대로 인상의 스케치라면, 시인이 연작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은 순수한 현재에 머무르려는 시의 저항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바다로부터, 강의 풍경으로부터 은총처럼 시가 다가오는 순간은 없을까. 그때 시인의 손은 무심코 목탄을 쥔 손을 움직이며 그 은총의 선을 그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은총의 순간이 지나가면 시도 지나갈 것이다. 은총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것은 어쩌면 세계와 사물이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는 순간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주장하며 솟구쳐 올라오는 ‘나’라는 주어의 기세를 누르고 바다의 포말, 강변의 날갯짓, 정오의 장미꽃 옆에 침묵하는 세상의 미미한 한 자락으로 있을 때만 열리는 빛. 세상의 거대한 무관심에 고개 숙일 때만 가능한 순간. 모든 시가 전주곡과 소묘의 자리로 물러설 때 조용히 다가오는 세상의 음악과 선(線). 경계나 개념, 도덕과 윤리의 길들임을 모르는 채로 일어나고 소멸하는 것들. 무의 언저리에서 꾸는 꿈이 거기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수(複數)의 ‘나’를 수용하는 경험과 인식의 두터운 켜들, 엄정한 기하학적 정신의 마중물이 없다면 직관의 은총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전주곡-소묘가 예비와 미완의 자리이면서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시의 영토를 지향하는 것은 전혀 모순이 아니다. 오히려 전광석화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과 끈덕지게 반복되고 쌓이는 것을 함께 견디며 노래하고자 하는 ‘전주곡-소묘’는 시가 처음부터 지향해야 할 운명이자 형식처럼 보인다.
‘목탄 소묘집’ 연작은 나그네로 중부 유럽 다뉴브강을 따라간 짧은 여정의 노래다. 흐르고 흐르며 사라지는 강의 흐름은 기슭 마을 삶의 풍경들과 함께 끝내 바다에 닿을 테지만, ‘전주곡’의 땅끝, 바닷가 가장자리에서 떠나온 시인의 시선은 이곳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강은 바다로 흘러가지만, 그것은 혹 자신의 원천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아닐까. 장석 시에서 바다가 끊임없이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일깨우고 있는 것처럼, 낯선 이방의 강을 따라가며 장석 시는 또 다른 자신의 얼굴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강에 기이한 풍경의 배 한 척이 정박해 있다. “북해로 가지 못하고/내륙의 지천에 얹힌 배”(「목탄 소묘집 2-6—내시경」). 시인은 배를 향해 묻는다. “어떤 착각으로/침로를 도시의 내장 안으로 잡았던 것인가”. 시의 마지막 세 연은 이렇게 이어진다.
모른다
아무것도 더 이상 태우고 싶지 않아서
부러 하수의 종말 쪽으로 숨어들었는지
어디엔가 둔 배표를 찾아내어
뱃전의 현문을 열고 나는 승선할 수 있는지
강에서 죽은 자만이 탈 수 있소
열리지 않는 문은 말할까
북해로 가지 못하고 지천에 얹혀 있는 이 배의 사연은 무엇일까. 강의 환영(幻影)처럼 보이기도 하는 배는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어떻든 배의 현문(舷門)은 시인에게 닫혀 있는 듯하다. 당연하지만 강물도 ‘바닷물’처럼 누군가에게는 ‘세속의 수의이자 마지막 통로’이기도 할 것이다. ‘강에서 죽은 자’만이 탈 수 있는 배는 이곳에 잠긴 슬픔의 역사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리지 않는 문”은 순탄한 슬픔의 공명을 가로막으면서 죽음의 낯섦과 강의 낯섦 모두를 시의 진실로 되돌려주는 것 같다(지금은 찾지 못하지만 배표는 어디엔가 있다). 시인이 “이 도시도 내 고향과 같은 시간의 그물에 있나”(「목탄 소묘집 2-3—꽃의 입 냄새, 베를린」)라고 묻고 확인하면서도 “눈먼 이처럼 나는 강을 따라가네”(「목탄 소묘집 2-10—홍수 후, 크렘스」)라고 쓸 수밖에 없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나그네’의 이러한 정직한 물러섬이 있었기에(생각해보면 ‘나그네’의 자리는 시인이 늘 서 있고자 하는 바닷가 기스락의 지향을 품고 있기도 하다), 중부 유럽의 한 작가가 쓸쓸한 죽음을 맞았던 요양원의 방을 ‘소묘’하는 짧지만 담대한 진실의 시적 울림이 가능했으리라.
장석 시에서 ‘바다’는 무한과 미지, 절대와 숭고의 추상적 공간이 아니다. 바다는 장석 시에 끊임없이 경계의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며, 거기서 장석 시는 ‘조간대(潮間帶)’의 삶이 다가오고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살아낸다. 장석 시의 바다는 흐르고 섞이는 강의 이야기, 삶의 이야기를 잊은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강은 장석 시에서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속으로 흘러가면서 동시에 원천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듯하다.
꿈길을 따라, 시인이 “꿈으로 몸을 피해” 돌아간 곳에서 “이쪽저쪽 꿈에서 멀리 온 우리”가 만난다. 바닷가 기스락의 경계가 품고 있는 이야기, 흐르고 흐르며 거슬러 오르는 강의 이야기, 삶과 꿈의 경계는 이렇게 아주 잠깐 낯선 도시의 광장에서 뒤섞이고 ‘흐물흐물’해진다. 그렇다면 「목탄 소묘집 1-18」에서 꿈길의 세 사람이 만나는 식탁은 이미 저 강물 너머로 흘러가버린 시간의 풍경일까, 미지의 수원 언저리에서 새로 태어나길 기다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풍경일까. 장석 시인의 『목탄 소묘집』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을 어느 새벽의 빛과 끊임없이 회귀하는 꿈길 사이, 그 긴 이별의 시간을 살면서 언제나 미완이며, 중단될 수밖에 없는 전주곡의 운명을 겸허하게 껴안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