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서 루마니아인 3000명과 친구가 되고,
넷플릭스 자막과 인터넷 뉴스로 문법과 어휘를 공부하는
모니터 앞에서 떠난 루마니아 유학
4년간의 대학 생활을 외톨이로 보내고, 취업까지 실패하면서 히키코모리가 된 저자 사이토 뎃초를 위로하는 것은 영화뿐이었다. 전 세계의 다양한 인디 영화들을 섭렵하던 그는 루마니아의 영화감독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의 〈경찰, 형용사〉를 보면서부터 목표 없이 흘러가던 삶에 변변한 교재도 없는 마이너한 언어인 루마니아어를 홀로 독학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채워넣기 시작한다.
그런 그가 루마니아어를 공부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곳이 바로 페이스북이었다. 페이스북으로 불특정의 루마니아인 3000명에게 친구 신청을 보낸 그는 자신만의 ‘루마니아 메타버스’를 만들어 그곳에서 루마니아인들과 교류하며, 루마니아어에 대한 감각을 키워나갔다. 넷플릭스에서는 언어 설정과 자막을 루마니아어로 바꿨고, 영문으로도 발행하는 인터넷 뉴스를 루마니아어판과 나란히 놓아 문법과 어휘를 공부했다.
그가 루마니아의 소설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페이스북 덕분이다. 하루하루 루마니아어 실력을 갈고닦던 그는 페이스북에 자신이 루마니아어로 쓴 소설을 읽어보고 싶은 사람이 있냐는 글을 올린다. ‘일본인이 쓴 루마니아어 소설’에 흥미를 보인 많은 사람들이 그의 소설을 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자는 한 통의 DM을 받는다. “당신의 소설, 마음에 들었어. 내가 편집장으로 있는 온라인 문예지에 싣고 싶어.” 그렇게 일본인 최초 루마니아어 소설가가 탄생했다. 어린 시절부터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저자의 꿈은 아이러니하게도 조국이 아닌 머나먼 타향, 한 번도 방문해본 적 없는 동유럽의 루마니아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허세라 해도 좋다,
나르시시즘이라 해도 좋다,
‘주변과는 다른 내가 멋짐’이라는 생각이
나를 만들어간다
이 책에서 저자 사이토 뎃초는 자신만의 독특한 독아론(獨我論)을 피력한다. 소위 ‘일반 대중과는 다른 취향’에 대한 선망과 그런 취향을 갖고 있는 나에 대한 자아도취를 꼭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 것이다. 자칫하면 허세 혹은 나르시시즘으로 손가락질당하기 쉬운 이런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취향’에 대한 욕망을 저자는 인생의 미학으로 삼아왔다. 이런 독아론이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마음가짐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자신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고 믿으며, 그 믿음을 실천해왔다. 개봉되지 않은 세계 각지의 영화를 탐닉한 것도, 루마니아 영화에 흥미를 가진 것도, 루마니아어에 빠지게 된 것도 모두 이런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취향’으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제일 중요한 요소는 루마니아어에 관해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일본 서점에는 관련 서적이 전혀 없었고, 심지어 대학에서도 전문적으로 배울 곳이 없었다. 애초에 루마니아어 자체를 아는 사람이 적었다. (…)
아무도 루마니아어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나는 이런 생각에 도달했다. 마이너한 언어를 배우려는 나, 완전 힙해…”
흔히 외국어를 배울 때면 그 언어를 어디에 ‘쓸’ 것인지를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그 언어가 갖고 있는 영향력을 고려하고, 그 언어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배우기가 쉬운지 어려운지 등을 꼼꼼히 따진다. 그러나 저자는 루마니아어가 앞서 말한 조건들과 정반대되기에 더욱 흥미를 느끼며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니 나는 ‘주변과 다른 내가 멋짐’이라는 나르시시즘에 인생을 걸었다. 그건 루마니아와 루마니아어에 인생을 거는 것이기도 했다.”
저자 자신조차 자신이 히키코모리가 되고, 영화 비평을 쓰다가, 루마니아어 소설가가 되리라는 것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무용하고 별 볼 일 없을지언정,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그저 묵묵하고 꾸준히 해온 끝에 결실을 맺었다.
삶이 어딘가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그 삶의 주인인 나조차도 알 수 없다. 삶을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세워두지 말고,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일이라도 그 안에서 무언가를 꾸준히 하고 있다면, 어느 순간 그 쓸모없던 일들이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줄 것이다. 아무도 걷지 않는 용감하게 걸어간 용감한 히키코모리의 모습에서 우리는 기묘한 희망과 마주하게 된다. 일단 인생을 멈춰 세워두지 말고 뭐든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무언가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