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는 사이에도 ‘무진 십자가 사건 앤솔러지’의 마감일은 다가오고 있었다. 편집자 A는 마감을 늦춰주었다. 천천히 쓰라고, 출간이 좀 늦어져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이 프로젝트를 처음 제안한 장본인이다. 그런데 나 때문에 늦어지면 어쩌자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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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가 왜 우리의 계획에 고분고분하게 응했는지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그런 개인적인 비극을 혼자 힘으로 감당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스스로 예수와 같은 고통 속에서 죽어가며 세상 모든 이를 구원하는 데서 생의 의미를 찾으려 했을지 모른다. 물론 그가 숨긴 사연을 일찌감치 알았다고 해도 결과가 바뀌지는 않았을 거다. 우리가 진행할 프로젝트를 가로막기에 동정이나 연민이라는 감정은 하등 쓸모없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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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나를 알고 있었다.
단순히 내 이름과 사는 곳을 아는 정도가 아니었다. 내 삶 전체를 관통해 모든 것, 약점이나 강점, 밝은 면이나 어두운 면까지 속속들이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것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기나긴 세월 동안 나를 내려다본 것만 같았다. 피부가 벗겨지고, 근육이 갈라지고, 뼈가 으스러지고, 마침내 내 안의 모든 것이 피를 뚝뚝 흘리며 드러나 보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더 버티지 못했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온몸에 힘이 빠진다고 느낀 순간, 나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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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규는 인터넷 커뮤니티 AP가 정확히 무엇을 목표로 움직이는 단체인지 알지 못했고, 관련해서 커뮤니티 측에서는 단 한 번도 명료한 활동 사항이나 목표를 제시하거나 밝히지 않았다. 오히려 규는 바로 그 점에 주목했다. 굳이, 분명하고 명료한 활동 사항을 의무적으로 해야만 하는 규칙이 있다면 그 규칙은 오히려 순수하지 못한 거라고 규는 확신했다. AP의 진짜 목적을 전혀 모른 채, 일부러 알고 싶지 않은 그 상태에서 규칙을 따르는 것만이 규는 뛰는 심장, 태어날 때부터 품어왔던 죄의식의 결정적 상쇄를 일으키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으며, 규는 그것이 바로 감히 십자가의 길이라 명명해야 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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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기자는 아니잖소. 봐요. 경주 십자가 사건은 무진 십자가 사건과 패턴이 똑같소. 큰 십자가 한 개와 작은 십자가 두 개를 세우고, 발판 위에 서서 망치로 자기 발에 못을 박고, 준비된 끈으로 십자가에 허리를 묶고, 목과 한쪽 어깨도 묶고, 작은 십자가에 달아놓은 거울을 보며 오른손으로 칼을 잡아 우측 옆구리를 찌르고, 양손을 수동 드릴로 구멍 내고, 한 손을 십자가 날개에 묶어놓은 끈 안으로 통과시켜서 미리 박은 대못에 손바닥을 끼우고, 나머지 손은 반대쪽에 끼우고, 출혈로 혼수상태가 되고, 몸이 앞쪽으로 구부러지고, 목이 조이고, 질식하고……. 국과수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잖소. 주변에 연장들과 설계도가 있었고, 자살 동기는 대충 나왔고, 타살 흔적은 없었으니 말이오.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사람 죽이는 거 봤소?”
245~246p
중위는 한참 만에 단망경을 내렸다.
중위는 턱을 만지며 잠시 생각했다. 십자가 주인공이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판단했지만, 그것은 단망경으로 보았을 때 그런 것이었고 가까이 가보면 양상이 다를 수 있기에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심한 중위는 통문 열쇠로 외문을 열고 철책 밖으로 나왔다.
경사로를 타고 비스듬히 내려온 중위는 곧장 십자가 쪽으로 가지 않고 해안포 벙커 앞에 멈춰 섰다.
30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