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이자 유일의 위구르 유목제국 통사
2016년 아시아학자세계협의회(ICAS) 최우수학술도서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한 경상국립대 정재훈 교수가 『돌궐 유목제국사』(2016), 『흉노 유목제국사』(2023)에 이어 『위구르 유목제국사』를 출간했다. 8세기 중반 돌궐을 대체해 몽골 초원을 지배하는 유목국가로 발돋움한 위구르는 당과 우호 관계를 맺어 물자를 확보하고, 상업과 행정에 능한 소그드 상인과 결합해 동서 교역을 주도하면서 동쪽의 싱안링산맥부터 서쪽의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지역에 이르는 거대한 유목제국으로 성장했다. 비록 국가로서의 역사는 채 100년을 채우지 못했지만, 위구르의 역사적 유산은 이후 동아시아 세계의 재편과 중앙아시아의 투르크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재훈 교수는 고대 투르크 비문 자료와 한문 자료, 최신 연구 및 발굴 성과를 종합해 유목민의 관점을 중심에 두고 위구르의 역사를 복원했다. 이 책은 국내 최초이자 유일의 위구르 유목제국 통사로, 유목 세계와 정주 세계의 역사를 ‘분리’와 ‘대립’이 아닌 ‘교류’와 ‘공존’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것이다.
출간 의의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유목제국 1000년 역사를 복원하다
흉노, 돌궐, 위구르로 이어지는 ‘고대 유목제국사 3부작’ 완성
국내의 대표적 중앙아시아사 연구자인 정재훈 교수와 1998년 이래로 중앙아시아사 분야 학술서와 교양서를 꾸준히 출간하고 있는 사계절출판사가 함께한 ‘고대 유목제국사 3부작’이 마침내 완간되었다. 정재훈 교수는 2016년 『돌궐 유목제국사』에 이어 2023년 『흉노 유목제국사』를 출간했고, 지난 2005년 박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출간했던 『위구르 유목제국사』를 새로운 형식과 체제에 맞게 다시 써서 8년여에 걸친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신간 『위구르 유목제국사』는 전 세계 중앙아시아사 학계의 최신 연구 성과를 전면 검토 및 반영하고, 지도와 도판, 고대 투르크 비문의 원문과 번역문, 국가 구조 및 카간의 계보를 담은 도표 등을 대거 보강하여 현시점에서 가장 충실하고 균형 잡힌 위구르 유목제국 통사로 완성되었다.
정재훈 교수의 ‘고대 유목제국사 3부작’은 기원전 3세기 중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 북아시아를 중심으로 전개된 약 1000년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제국을 형성했던 흉노, 돌궐, 위구르가 중심이지만, 그 밖에도 북아시아 초원에 등장했던 수없이 많은 유목 세력의 길거나 짧았던 역사를 전반적으로 아우른다. 정 교수는 이 3부작을 통해 유목제국의 세계사적 위상과 의미를 환기하고, 유목민이 활약했던 무대인 ‘초원’을 정주 세계와 동등한 하나의 역사 단위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독자들은 이 3부작을 통해 중국사 중심의 동아시아사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유목민이 파괴와 살육을 일삼는 ‘야만적인’ 존재가 아니라 동서를 연결하며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역동적인 주체였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위구르는 교역 국가를 지향한 유목제국이었다”
문명사관과 중국 중심 역사관에서 벗어나 위구르의 세계사적 위상 재정립
5세기 중반 고차의 일원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 위구르는 당의 기미 지배를 받으며 군사적 봉사를 하거나, 돌궐에 귀순했다 벗어나기를 반복하며 세력을 유지하다가 744년 건국을 선언했다. 건국 이후 카를룩, 바스밀 등 주변 세력을 차례로 복속하는 한편, 기마궁사로서 ‘군사적 특기’를 발휘해 당의 변경 방어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당에서 온 화번공주와 카간이 혼인하면서 초원에 정주 시설을 마련하고 다수의 정주민을 받아들였으며, 당과의 견마무역에서 얻은 비단을 소그드 상인을 통해 서방으로 유통시키면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787년 당과 토번의 대립으로 하서 교통로가 막히자, 당에서 막북 초원을 거쳐 북정(베쉬 발릭)에 이르는 ‘회골로回鶻路’를 연결하고 이를 발판 삼아 790년대 초에는 서방 오아시스 지역까지 영역을 확장해 동서 교역의 주역이 되었다.
위구르는 초기부터 초원에 성곽으로 둘러싸인 교역 거점인 이른바 ‘카라반사라이’, 즉 도시를 건설했는데, 교역로를 따라 이 도시들이 연결되면서 초원에 ‘도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이 도시들은 계절 이동을 하는 유목민과 교역을 위해 드나드는 상인, 중국을 비롯한 정주 세계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교류하고 공존하는 공간이 되었고, 이를 운영하며 교역 국가를 지향하던 위구르는 9세기에 이르러 거대 유목제국으로 발전했다. 자연재해와 전염병, 계승 분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840년 갑작스럽게 붕괴하고 말았지만, 각지로 흩어진 그 후예들은 ‘위구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며 이후 세계사의 전개에 큰 영향과 유산을 남겼다.
이와 같이 위구르는 동서를 연결하는 거대한 제국을 운영했지만, 그동안 그 역사적 위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초원에 들어선 정주민을 위한 거주 시설, 상업과 행정에 능한 소그드인과의 결합, 고등 종교인 마니교 수용, 문자 사용, 당과의 적극적인 교류 등 위구르가 보인 포용적이고 탄력적인 모습은 일본과 서구 학자들에 의해 ‘정주화 지향’으로 해석되었다. 즉 유목민은 생활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점차 정주 세계에 ‘동화同化’할 수밖에 없는데, 위구르 역시 ‘정주적 요소’를 적극 수용하며 점차 ‘문명화’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붕괴 이후 이들이 주변 지역으로 이주하여 중앙아시아의 ‘투르크화’를 야기했다는 사실이 그 증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10세기 초 민족 이동기에 농경 지역과 초원을 동시에 지배한 이른바 ‘정복 왕조’인 거란의 등장과 연결하여 위구르를 ‘고대 유목국가의 종말’이자 ‘정복 왕조의 배경’인 과도기적 유목국가로 규정하는 논의도 있었다.
그러나 정재훈 교수는 이와 같은 논리는 모두 ‘열등한’ 유목국가가 ‘우월한’ 정주국가를 향해 발전해간다는 일종의 문명사관일 뿐만 아니라, 유목제국의 운영 방식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흉노, 돌궐을 거쳐 위구르에 이르기까지 유목제국 특유의 생존 방식을 연구해온 정 교수는 다양한 외래 요소와의 공존 자체가 유목제국의 본질적인 속성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흉노, 돌궐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 즉 막북 초원에 고립되어 있던 위구르의 입장에서는 정주적 요소를 적극 수용해 교역 국가로 발전해가는 것이 곧 체제를 강화하고 유지하는 길이었다.
교역 거점이기도 한 도시의 건설이 제국의 ‘하드웨어’를 확보한 것이었다면, 마니교와 같은 고등 종교의 수용은 다양한 능력을 지닌 외래 집단의 문화 전반을 받아들여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소프트웨어’의 완비였다고 할 수 있다. …… 760년대 위구르는 당으로부터 확보한 막대한 양의 비단을 바탕으로 교역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마니교도 상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뵈귀 카간은 이들이 머물 수 있는 도시를 건설하고 마니교를 받아들였다. 이는 유목국가 운영에 필요한 기본 요소 중 하나였다. 막북 초원이라는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고 유목제국을 발전시키려면 외부의 다양한 요소를 받아들여야 했다. 기존 연구들에서 지적한 바와 달리, 위구르가 정주적 성격을 보이는 외래 요소를 수용한 것은 붕괴 이후 오아시스 등지로 이주해 정주하기 위한 것, 즉 ‘문명화’의 전제가 아니었다. 교역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 체제를 고도화하는데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뿐이다. - 204~212쪽
유목제국 위구르의 역사가 온전히 평가받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현대 중국 영토의 일부인 신장위구르자치구가 처한 정치적 상황이 객관적인 역사 연구를 어렵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소수민족 위구르를 하나의 중국에 통합하려는 정치적 고려에 의해 당과 위구르의 우호적 관계만을 강조하거나, 위구르 고유의 ‘민족사’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정재훈 교수는 제삼자의 시각에서 중국 편향적인 시각을 교정하고, 유목민의 입장을 더해 한층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역사를 서술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 책은 문명사관은 물론 ‘중화민족공동체’ 중심 역사관에서도 벗어나, 유목적 관점을 중심으로 위구르의 세계사적 위상을 다시 세우는 작업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고대 투르크 비문 자료와 한문 자료의 연결
지난 100여 년간의 투르크 비문 및 위구르 역사 연구 집대성
정재훈 교수가 유목민의 관점에 가까운 역사 서술을 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원사료, 그중에서도 위구르가 남긴 고대 투르크 비문을 직접 읽고 해석하여 한문 자료와 연결하는 것이다. 유목민들의 역사는 대개 정주 세계가 남긴 방대한 사료를 통해 연구될 수밖에 없는데 다행히 돌궐, 위구르 등은 고대 투르크 문자로 새긴 비문, 즉 자신의 기록을 남겼다. 특히 위구르는 고대 투르크 문자만이 아니라 상인이나 관료로 활약한 소그드인의 문자와 한자로도 비문을 남겨 그들 자신의 관점과 입장을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다소 편파적인 한문 자료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기록의 공백을 보충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책은 위구르의 2대 카간인 카를륵 카간이 군사 원정의 승리를 기념하고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세웠던 기공비인 《테스 비문》과 《타리아트 비문》, 그리고 카를륵 카간의 묘비인 《시네 우수 비문》 및 12대 카간인 소례 카간 시기에 고대 투르크 문자, 소그드 문자, 한자로 새긴 《구성회골가한비문》의 기록을 중국의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책부원구』 등의 사료와 비교해 위구르 유목제국의 ‘진상眞相’에 다가간다. 고대 투르크어 자료와 한문 자료를 모두 검토하여 두 기록 사이의 불일치나 공백을 유목 권력의 특수성, 유목 경제의 운영 방식 등에 비추어 설득력 있게 해석하는 것이 이 책의 백미다. 유목국가는 군주의 개인적 능력이나 권력 집중도 등이 국가의 존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정 교수는 특히 ‘카간권’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위구르의 역사 전개를 추적한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돌궐의 국가 구조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위구르의 국가 구조가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한문 자료를 근거로 통치 체제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을 하거나, 위구르가 중국식 관직명을 도입한 것에 주목해 7세기 후반 당의 지배하에서 그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한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비문 자료를 고려하지 않고 한문 자료에만 기초한 초보적인 검토에 불과했다. 국가 구조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비문 자료의 복원을 통해 가능하다. 특히 2대 카간인 카를륵 카간이 남긴 비문에는 건국 이전, 부왕과 함께한 건국 과정, 이후의 체제 정비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중에서도 카를륵 카간이 753년에 세운 기공비인 《타리아트 비문》에서 건국의 완성을 천명한 점에 착안해 이 무렵 전후를 ‘건국기’로 설정하고, ‘국가 건설과 성장 과정’을 정리해볼 수 있다. - 44~45쪽
뿐만 아니라 정재훈 교수는 학계에서 논쟁적으로 다루는 여러 주제들, 예를 들어 ‘유목 세계의 중심지인 외튀켄은 어디인가’, ‘한문 자료에 힐간가사頡干迦斯 또는 힐우가사頡于迦斯라고 기록된 인물은 이후 회신 카간으로 집권한 쿠틀룩이 맞는가’, ‘위구르의 마니교 수용 양상은 어떠했는가’, ‘위구르가 붕괴 이후 막북 초원을 떠난 이유와 전염병(탄저병)의 발생’과 같은 문제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밝힌다. 원사료의 충실한 번역, 중국이나 서구 학계에 만연한 편견에서 벗어난 해석, 동물 전염병에 대한 수의학적 지식 원용, 영미권은 물론 유럽, 일본, 중국, 러시아, 몽골의 연구 성과까지 모두 검토한 뒤에 신중하게 정리한 저자의 서술을 통해 독자는 위구르 유목제국의 본모습에 다가갈 수 있다.
아울러 이 책에는 19세기 말 유럽 탐험대의 발견과 조사 이래로 100여 년간 축적된 발굴 성과와 저자의 실제 답사 결과를 종합한 현장 지식도 담겨 있다. 저자는 문헌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이지만, 20년 이상 몽골 초원 지역을 직접 답사하며 ‘유목’이라는 생산 양식을 낳은 현지의 지형과 기후를 살피고, 정주 세계와의 교류 속에서 유목민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을 조사해왔다. 이 책에는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 자료뿐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제작한 지도와 도표가 빼곡하게 담겨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100여 년간 축적된 문헌 연구와 발굴 성과를 집대성한 결과물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다.
붕괴 이후 위구르의 후예가 남긴 신화 분석을 통한
위구르의 역사적 유산과 정체성 확인
앞서 등장했던 흉노, 돌궐과 다르게 위구르는 현재 ‘위구르’라는 이름을 그대로 잇는 이들의 땅이 존재하고,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자신들의 역사 인식의 근거로 위구르 유목제국을 소환한다. ‘위구르’라는 정체성이 이렇게 면면히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재훈 교수는 위구르의 붕괴 이후 각지로 흩어졌던 세력 가운데 고창 위구르의 후예인 고창왕이 14세기에 몽골 초원에 대한 기억과 유목 세계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자부심을 담아 제작한 《역도호고창왕세훈비》의 신화 기록에 주목한다. 비문 첫 부분에 기록된 시조 탄생 신화의 한문 채록본과 페르시아어 기록(주베이니의 『세계 정복자의 역사』, 라시드 앗 딘의 『집사』)을 비교하여 성스러운 나무와 햇빛, 성스러운 숫자 ‘5’ 등의 신화 모티브를 추출하고, 신화의 지리적 배경으로 제시된 강과 고창 위구르의 지배 집단인 복고의 원주지인 톨강, 그곳에 남아 있는 무덤 유적 등을 연결한다. 이를 통해 위구르의 후예이자 5세기 ‘오부고차’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복고의 후손으로서 투르크 유목민의 정통성을 계승하고자 한 고창왕의 역사 인식을 드러낸다.
14세기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던 위구르의 후예 고창왕에게 과거 몽골 초원을 지배했던 조상이 남긴 역사적 경험은 너무나 중요했다. 조상의 원주지를 새로운 세력인 몽골계 이주민에게 넘겨주고, 대제국을 건설한 그들에게 지배당하며 하서에 머물던 그는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며 다시 영광스러운 역사를 꽃피우고자 했다. 몽골 초원을 무대로 유목제국을 건설했던 선주민으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고, 당대의 지배 세력인 몽골제국과는 다른 역사 인식을 보여주며 새로운 역사를 쓰고자 했다. …… 위구르 멸망 이후 그 유산을 가지고 각지로 흩어진 투르크 유목민의 역사는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 전반에, 나아가 세계사의 흐름에 막대한 영향을 남겼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 345~346쪽
위구르의 정체성이 오랜 시간 이어진 또 하나의 이유는 위구르가 자신의 언어를 유지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과거 초원에서 빌려 썼던 고대 투르크 문자 대신 소그드 문자를 변용한 ‘위구르 문자’를 새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위구르는 자신의 문자와 언어를 사용하며 오아시스 지역의 토착민을 일부 동화시키기도 했고, 중앙아시아에 투르크어 사용자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위구르가 붕괴한 이후 몽골 초원은 더 이상 투르크 유목민의 땅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 역사적 유산은 오래도록 이어져 그 이름을 계승하는 후예들을 남긴 것이다. 이 책은 위구르의 붕괴가 이후 동아시아 세계의 세력 재편, 나아가 세계사의 흐름에 끼친 영향까지를 아우르며 초원 세계를 왜 하나의 역사 단위로 보아야 하는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