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홍만종(洪萬宗)
이 책의 편저자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은 풍산 사람으로 자는 우해(于海), 호는 현묵자(玄默子), 몽헌(夢軒), 장주(長洲)라 했다. 부친 주세(柱世, 1612∼1661)는 자가 우문, 호가 정허당으로 생원과 문과를 거쳐 정랑에 이르고 영주군수를 지냈으며 뒤에 도승지에 증직되었다. 조부 보(靌, 1585∼1643)는 진사와 문과 장원으로 소무훈에 책봉되어 풍령군에 봉해지고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으며 뒤에 영의정 및 부원군에 증직되었다. 증조 난상(鸞祥)은 형조좌랑을 역임했으며, 고조 수(修)는 부사직을 역임했다. 선조의 장녀 정명옹주에게 장가든 부마 주원(柱元)과는 재당질간이니 고조대에서 분가되었다. 외가는 중종대 영의정을 역임한 정광필의 후손으로 외조가 이조참판 광경이며 외숙이 좌의정 지화였다.
이 같은 좋은 배경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동명 정두경의 문하에서 시를 배우며 휴와 임유후, 백곡 김득신, 만주 홍석기 등과 더불어 나이를 잊은 만년지교를 맺고 시주를 즐겼으나 이는 나중의 일이다. 그의 생애에서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20세 때의 부친상과 연이은 득병, 10년 이상의 긴 요양 이후 출사했으나 곧 이은 파직이 아니었을까 한다. 명확하지 않은 부친의 죽음이나 당쟁에 휘말려 삭탈관직되는 개인적 불행은 남자 형제도 없는 단신인 그에게 저작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이 기회를 촌로나 일반 서민들과 교유하는 장으로 만들며 시간적 여유를 누렸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교서관제조 신완(申玩, 1646∼1707)의 추천으로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叢目)》의 편찬 기회를 얻었지만, 이것마저 고지식한 신료들의 “포폄여탈”, “참람되다”는 비난을 받음으로써 그의 저작이 더 이상 유포·간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당쟁의 여파가 평생 그에게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에 새로 발굴된 그의 친필문고 《부부고(覆瓿藁)》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청구영언(靑丘永言)》이나 《고금소총(古今笑叢)》, 《속고금소총(續古今笑叢)》 외에도 그가 수많은 기록을 남겼음이 밝혀졌다. 그 저술의 범위도 그렇거니와 내용을 봐도 그가 얼마나 방대한 자료를 섭렵해 하나하나 분류를 시도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앞으로 그에 대해 보다 광범위한 조사와 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번역 : 정용수
정용수는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를 거쳐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고전문학 전공으로 문학석사 및 문학박사 과정을 수료해, 동아대학교에서 정년을 마쳤다. 2000년부터 버클리 대학교(U.C. Berkeley) 동아시아연구소(Institute of East Asia Studies)에서 1년간 객원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고전 번역과 저술에 전념하고 있다.
역서로 《후탄선생정정주해 서상기》(국학자료원, 2006), 《전등신화구해》(푸른사상, 2003), 《고금소총 명엽지해》(국학자료원, 1998), 《국역 소문쇄록》(국학자료원, 1997)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