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서문
조선후기의 실학에 관한 연구에 종사한 지도 어언간 반세기가 흘렀다. 만년에 『경세유표』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경세치용학의 체계가 정전법 및 부공제와 관제라는 것을 밝혔는데, 그후에 『반계수록』에 관한 검토를 통하여 이를 거듭 확인하게 되었다. 그때에는 나의 조선후기 실학에 관한 연구가 체계적 탐구를 본질로 하는 학문의 경지에 걸맞는 수준에 이른 것 같아서 정말 기쁘기 짝이 없었다. 이제 미수를 맞이하여 학문 생활을 차차 마감해야 하는 시점에서 이용후생학에 관한 연구도 조금은 남겨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에서 『북학의』를 번역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우선은 『북학의』의 번역을 통하여 나의 한문 해독력을 시험해보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번역하는 과정에서 내가 미쳐 예상하지도 못했던 이용후생학의 체계가 거기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용후생학은 『상서』 대우모의 「수화금목토곡유수, 정덕이용후생유화」에 그 경전적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육부를 닦고, 삼사를 조화롭게 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하는 것이다. 『북학의』의 목차를 검토해보면, 내외편의 ‘수레’로부터 ‘뽕나무와 과실’에 이르는 43항목과 ‘농잠총론’에서 ‘병오소회’에 이르는 13항목, 그리고 진상본의 ‘수레’으로부터 ‘기천영명은 역농에 근본한다’에 이르는 24항목과 ‘농잠총론’으로부터 ‘존주론’에 이르는 4항목이 각각 육부와 삼사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용후생학의 체계인 것이다.
본래 『북학의』를 구성하는 각 항목들은 조선후기의 사회적 실상을 매우 자상하게 설명해주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실제로 그것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라면, 『북학의』가 조선후기에 관한 어떠한 연구보다도 조선후기의 실상을 잘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학의』의 가치는, 단순히 조선후기의 실상을 잘 설명해주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선후기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는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북학의』는, 조선후기의 기본 문제를 ‘빈곤’에서 찾았고, 그 해결방향을 당시에 가장 선진국으로 생각되었던 ‘중국과의 통상’에서 찾으려고 했다.
조선후기와 같은 정체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에서 시대적 과제의 해결방안을 개혁개방에서 찾으려고 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조선후기와 같은 그 지독한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안으로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농잠업을 진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대외통상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라는 것이다. 20세기 후반기에 한국이 개혁개방을 통하여 경제발전을 이룩한 그 정책방향이 이미 이용후생학에서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혹시 조선후기에 관한 연구가 내재적 발전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맹아론에 매몰되는 것은 시대착오가 아닐까.
개혁개방의 국제주의를 통한 경제발전에 의하여 나라가 부강하는 선진국에 진입한 오늘날에 있어서도 한국사에 관한 연구는 아직 배외적 민족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이러한 연구상황 하에서 『북학의』를 개혁개방의 선구라고 해설하는 것은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일종의 반역일 것이다. 그리고 또 『북학의』는 조선후기의 빈곤과 정체성을 낱낱이 폭로하고 그 극복방향을 일일이 ‘중국에서 배우자’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추구하는 연구자들에게는 일종의 반동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학의』의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내재적 발전의 계기가 미약한 역사적 상황 하에서는 국제주의만이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향이라는 깊은 통찰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북학의』는 전역을 기준으로 할 때, 세 가지의 번역서가 있다. 모두 한문 원문을 정리하고 초역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난관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하겠으나, 또 사정이 그러했기 때문에 오역이나 불충분한 번역이 너무 많다. 필자의 번역은 선행의 번역을 참고할 수 있는 학문적 혜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오역을 줄이고 명확한 번역이 되도록 애썼다. 기존의 번역보다 조금이나마 나은 점이 있을까. 그러나 필자의 번역에 있어서도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는데, 그러한 곳은 본문에 일일이 밝혀두었다. 이러한 미비점은, 한문 원문의 미비점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앞으로의 해결과제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이 책이 출판되기까지 여러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북학의』 전공자 안대회 교수는 애써 정본화하여 입력한 한문 원문을 흔쾌히 나의 번역에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리고 박덕제 교수(노동경제학 전공), 김경회 사장(경영학 전공) 및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 박이택 박사는 번역문의 개선과 교정에 힘써주었다. 끝으로 오늘날 출판사정이 매우 어려움에도 율곡출판사 박기남 사장은 선뜻 출판을 맡아주었다. 위의 여러분에게는 물론, 이 책의 출판에 애써주신 율곡출판사 직원 여러분에게도, 필자의 마음속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2024년 6월 28일
미수를 자축하면서 안병직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