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이불 밑에 숨기는 아이를 상상했다. 아이는 도서관이 사라진다는 걸 알고 있고, 그래서 일주일만 감춰두면 그 책은 자신의 것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되지 않을까. 책의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 아닐까.
_「이 책을 펼치면」에서, 22쪽
특정한 조건을 갖추면 발휘되는 특수한 힘. 다만 그 조건이 무엇인지, 어떤 힘인지 알지 못할 뿐. 그래서 때로는 초능력을 쓰면서도 그게 초능력인지 모르기도 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지윤이 주장해온 ‘만인초능력자설’. 나는 이제 그 주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지금 내 머리를 감겨주고 있는 이 미용사가 샴푸의 초능력자, 샴푸의 요정인 게 분명하니까.
_「샴푸의 요정」에서, 30쪽
나는 환자의 손에 눌려 납작해졌던 몸 안의 솜이 내 몫을 해냈다는 뿌듯함으로 다시 둥실둥실 부푸는 것을 느낀다.
_「양 치과의원의 비밀」에서, 57쪽
으아아아,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여자친구와 사귄 지 500일이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10년 전에 헤어진 전 여자친구의 카페에 가서 케이크를 사야 한다니. 게다가 그 전 여자친구와의 이별은 상대의 무책임한 잠수 이별이었단 말이다.
_「빅토리아 케이크」에서, 70쪽
대표는 서류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마치 자기가 잘못 보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눈을 비비기도 하고, 암호 해독기의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기도 하고, 급기야 종이를 흔들어보기도 했다.
_「메타버스 학교에 간 스파이」에서, 129쪽
다른 고양이가 와도 괜찮아. 나는 잘 알거든. 네가 몹시 닮은 날들을 보내더라도 결코 똑같은 날들이 아니리란 걸.
_「타로의 지혜」에서, 142쪽
그때 내가 느낀 건 면접을 망쳤다는 예감이 아니라 눈앞의 사람에게 무례한 말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지은 선배는 잡지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면전에서 그가 사랑하는 대상의 죽음을 선고한 거나 다름없었다.
_「마담 G의 별자리 운세」에서, 146쪽
치솟는 물가를 고려하면 연봉 조금 올리는 것보다 구내식당이 더 나은 선택이라 여기며 여러 회사 중 이 회사를 골랐던 건데. 이따위 ‘오징어볼’이라니. 효정은 뭔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_「점심시간의 혁명」에서, 166쪽
20세기에 해체한 아이돌 그룹이 21세기의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부활해 현역 시절보다 더 큰 인기를 얻게 되리라는 걸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_「밀크드림」에서, 175쪽
흙더미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겼다. 언제, 누가, 왜 골목 입구에 어린아이 키만큼 흙을 쌓아둔 것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_「사랑의 탄생」에서, 2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