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바로 이게 내게 닥친 불행입니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손꼽히는 러시아 사실주의의 거장
‘시인의 마음’ ‘사냥꾼의 눈’을 지닌 투르게네프가 그린
첫사랑의 빛나는 순간과 치명적인 유혹, 그리고 혼란의 시대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3대 거장으로 손꼽히는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의 장편소설 『연기Дым』가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89번으로 출간되었다.
19세기 독일의 바덴, 수많은 사람들이 사교를 위해 모여들고, 해외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지식인들은 농노해방 이후의 진로에 대해 지리멸렬한 논쟁을 이어간다. 바덴에 머물며 약혼자를 기다리던 러시아 청년 리트비노프는 한때 열렬히 사랑했으나 사교계를 향해 떠나가며 자신을 배신했던 첫사랑 이리나를 만나고, 갑작스레 나타난 이리나로 인해 리트비노프의 도덕과 삶의 계획은 한순간에 무너진다.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사랑 이야기를 주축으로 러시아 사교계 인사들의 위선과 탐욕, 정치적 진영 간의 싸움을 적나라하게 풍자한 이 작품은 당시 러시아의 핵심 문제들에 대한 ‘사회 ‧ 정치적 연대기’이자 ‘예술적 주석’이다.
사냥꾼의 눈, 시인의 마음
나에게 투르게네프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다. _어니스트 헤밍웨이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아름다운 자연과 러시아인들의 우수 어린 삶을 서정적으로 묘사하는 ‘시인의 마음’과 동시대의 사회 · 정치적 현실을 성실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사냥꾼의 눈’을 지닌 19세기 러시아의 위대한 사실주의 작가이다. 그는 부유한 지주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가혹한 농노제도의 현실을 지켜보며 성장했는데, 중부 러시아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사랑과 농노제도에 대한 증오는 투르게네프 문학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다.
투르게네프는 6대 장편(『루딘』『귀족의 보금자리』 『전날 밤』『아버지와 아들』『연기』『처녀지』) 에서 1840~70년대 러시아의 중요한 사회 · 정치적 문제와 논쟁을 마치 지진계처럼 민감하고 정확하게 기록한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가이자 ‘연대기 작가’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에는 휴머니즘과 진실성, 진 · 선 · 미에 대한 믿음, 사랑과 자기희생, 불멸의 형상들이 가득하고, 낭만주의와 리얼리즘, 섬세한 시정과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 및 객관적 묘사가 융합되어 있다.
또한 러시아 문학이 서구를 향해 말을 걸기 시작하고 세계문학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된 것은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가 아닌 투르게네프의 펜 끝을 통해서였다. 투르게네프는 세계적인 명성과 인정을 받은 최초의 러시아 작가로, 그는 활발한 창작 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 괴테, 플로베르 등을 러시아에 번역 · 소개하고, 푸시킨, 고골, 레르몬토프, 톨스토이 등을 유럽에 번역 · 소개하여 그 당시 세계문학의 변방에 위치했던 러시아문학을 세계문학의 중심에 우뚝 서게 했다.
“그래요, 나는 이상하고 매력적이고 혐오스럽고 소중한 조국
러시아를 사랑하고 증오합니다”
19세기 러시아의 사회 ‧ 정치적 연대기 혹은 예술적 주석
나는 힘과 능력이 있는 한 셰익스피어가 말한 시대의 형상과 중압을,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주요 관찰 대상인 급변하는 러시아 교양 계층인들의 모습을 적합한 유형 속에 성실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구현하고자 했다. -투르게네프,「장편소설에 부친 서언」(1879)에서
전제주의, 농노제도, 러시아정교는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강고하게 지탱하는 세 축이었다. 그러나 국내외 상황의 변화로 이 세 축이 흔들리면서 러시아의 사회 · 정치 지형도는 급변하고 러시아의 향후 개혁과 발전 방향에 대해 세대, 정파, 계층 사이 첨예한 갈등과 논쟁이 벌어진다.
『연기』는 독일 바덴을 배경으로, 러시아 농노제 폐지(1861) 이후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지식인들 ― 농민사회주의를 표방한 진보 진영과 모든 것을 농노해방 이전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반동적인 진영 ― 을 중심으로 한 사회 · 정치적 테마와 이리나와 리트비노프의 위험한 사랑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다. 실제로 해외에서 활동한 러시아 혁명가들과 투르게네프 사이에 벌어졌던 뜨거운 논쟁의 예술적 반영이자 기록인 이 작품은, 주인공 리트비노프의 시선을 통해 진보 진영의 모호한 입장과 러시아 사교계의 위선과 탐욕, 그리고 보수 진영의 반동성을 적나라하게 희화하고 풍자한다.
민감한 문제를 다룬 투르게네프의 장편은 언제나 좌우 이념 투쟁의 격전장이 되었지만,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고 모국에 대한 애정과 증오를 담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며 꾸준히 견해를 피력했다. 다섯번째 장편소설인 『연기』는 개혁기 러시아의 혁명적 사건들에 대한 ‘예술적 주석’이자 ‘사회 · 정치적 연대기’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가수’ 투르게네프가 그린
첫사랑의 빛나는 순간과 치명적인 유혹
‘연기다, 연기’ 하고 그는 여러 번 되뇌었다. 갑자기 그에게 모든 것이 연기처럼 보였다. 그 자신의 삶도, 러시아의 삶도, 인간의 모든 것도, 특히 러시아의 모든 것이 연기처럼 보였다.(259쪽)
서정시와 서사시, 단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거부할 수 없는,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과 휴머니즘, 낭만주의적 색체도 투르게네프의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다. 주인공 리트비노프는 대학 시절 너무나 강렬했던, “한 생애에서 되풀이될 수 없고, 또 되풀이되어서도 안 되는 수난”과 같은 첫사랑을 했으나 허망하게 배신당했다. 시간이 지나 약혼한 몸으로 자신을 배신했던 이리나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리트비노프는 다시 흔들린다. 이리나 역시 리트비노프를 사랑했으나, 자유, 사교계의 풍요와 환락은 쉽게 저버릴 수 없다. 대책 없어 보이는 리트비노프의 순수함과 대비되어 이리나의 욕망, 이중성, 속물근성이 자연스럽게 폭로된다. 리트비노프와 타냐와 이리나의 삼각관계, 그들의 말과 행동, 미세한 제스처, 눈빛 등을 통한 복잡하고 모순된 감정의 섬세한 심리묘사는 ‘사랑의 가수’인 투르게네프의 기량을 잘 보여준다.
투르게네프는 사회의 대변혁 속에서 모든 것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형체 없이 떠도는 연기와 같은 시대의 분위기를 이 작품에 담아냈다. 열정적이지만 이기적인 이리나의 사랑, 혼란의 시대에 난무하는 지식인들의 공허한 말들. 투르게네프는 허무함이 연기처럼 맴도는 19세기 러시아를 혼란에 빠진 한 청년의 사랑과 삶을 통해 그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