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원숙한 중년을 맞이한 저자가 철학자로서 인류의 보편 과제를 붙들고 분투한다는 소명을 자각하고 실천하고 있다고 느꼈다. 철학자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자세를 오랜만에 다시 바라본 듯하다. 비록 세월이 흘러 상상하지도 못한 일을 당연시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지금도 지적 호기심을 해소하고 불안을 헤쳐나갈 힘을 얻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당장 이 책의 독자로 나서기를 진심으로 권한다. ― 7쪽 〈옮긴이 서문〉 중에서
관광객과 가족은 일상적 의미로 볼 때 꽤 거리가 있어 보인다. 관광객이라는 단어에는 호기심에 이끌려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무책임한 소비자라는 인상이 풍긴다. 그렇기 때문에 《관광객의 철학》에서는 관광객을 친구나 적이 아닌 제3의 존재에 비유했다. 한편, 가족이라는 단어는 이와 대조적인 인상을 풍긴다. (중략) 그런데도 가족과 관광객이 손을 잡고 연대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관광객의 철학》에서는 이 점을 명확하게 이론화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는 전통적인 철학을 참조하여 이 둘의 연관성을 또렷한 언어로 기술하고자 한다. ― 13쪽 〈1장 가족적인 것과 그 적〉 중에서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은 이와 전혀 다른 양상을 의미한다. 게임에는 본질이 없기 때문에 발화자는 한 게임에서 다른 게임으로 어느새 이동해버린다. 이것이 언어게임론의 핵심 주장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동의 불가피성에 관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가족적 유사성’이라는 말을 제안했다. 한마디로 그는 공동체가 닫혀 있는 모습이 아니라 닫힐 수 없는 모습으로서 가족의 비유를 끌고 들어왔다. ― 34쪽 〈2장 정정 가능성의 공동체〉 중에서
관광객이란 오키나와, 후쿠시마, 헌법 개정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해 정치적 의지를 표명하는 운동의 공동체에 참가했다가 훌쩍 사라지는 일반 시민을 가리킨다. 당사자나 활동가가 보기에 그들의 존재는 걸리적거릴지도 모른다. 함께 나서서 운동의 미래를 열어가는 것도 아니니까 진심이 아니라면 나가주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중간한 사람들의 참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공동체는 지속할 수 없다. 운동도 지속할 수 없다. 그것이 비트겐슈타인과 솔 크립키의 언어철학에서 이끌어낸 실천적 결론이다. ― 88쪽, 〈3장 가족과 관광객〉 중에서
우리는 단순한 더하기조차 완벽하게 정의할 수 없다. 솔 크립키가 말한 회의론자를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리, 선, 미, 정의 같은 까다롭고 섬세한 개념을 상대로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는 회의론자의 출현을 어떻게 배제할 수 있단 말인가. 인문학자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인문학은 모든 중요한 개념에 대해 역사나 고유명이 없는 정의는 처음부터 포기하고 선행하는 텍스트를 다시 읽어냄으로써, 다시 말해 ‘정정’함으로써 재정의를 되풀이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선행자의 업적을 무비판적으로 존중하는 비과학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행위로 보인다. 하지만 결코 그것이 목적은 아니다. ― 139쪽, 〈4장 지속하는 공공성으로〉 중에서
《호모 데우스》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이전인 2015년에 출판되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롭게도 이 저작은 인류가 감염증을 극복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중략) 새삼스레 지적할 것도 없이 유발 하라리의 인식은 틀렸다. 《호모 데우스》 출간 후 겨우 5년이 지나 신형 코로나바이러스가 출현했고 글자 그대로 “지구를 뒤덮는 사태가 일어나서 몇백만 명이 목숨을 잃는 일”이 일어났다. 동시에 이번의 인명 상실이 ‘인재’이고 누군가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 156~157쪽, 〈5장 인공지능 민주주의의 탄생〉 중에서
루소의 경력을 대강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단순한 철학자가 아니었다. 특히 문학의 업적이 대단하다. 특히 《신엘로이즈》와 《고백》은 새로운 인간관을 제시해 19세기 유럽을 석권하는 ‘낭만주의’의 선구가 된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중략) 이 인간관은 오늘날 ‘문학적’이라고 여겨지고 널리 퍼져 있는 만큼 루소가 독창적이고 새롭게 만들어냈다고 느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착각이다. 루소야말로 이 인간관을 문학에 도입하고 세계에 널리 퍼뜨린 인물이기 때문이다. ― 186쪽, 〈6장 일반의지라는 수수께끼〉 중에서
나는 인간의 사회를 생각할 때 ‘나’라는 고유성의 감각과 똑바로 마주하지 않는 사상은 모두 원리적 결함이 있다고 판단한다. 인공지능 민주주의는 현행 민주주의보다 효율적일지 모른다. (중략) 그러나 그것이 삶의 일회성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의사를 집단의 표현으로만 이해한다면 결코 지속적인 통치를 실현할 수 없다. (중략) 이것이 언어게임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정 가능성의 철학이 필요하다. ― 262쪽 〈7장 빅데이터와 ‘나’의 문제〉 중에서
《신엘로이즈》를 한마디로 말하면 연애소설이고, 쥘리라는 여성을 서로 차지하려는 생 프뢰와 볼마르가 대립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단순한 연애소설은 아니다. 두 남자의 대립은 소박한 자연과 인공적 자연의 대립이고, 사회계약의 절대성과 ‘작은 사회’의 대립이므로 일반의지와 정정 가능성의 대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이러한 철학적 관점으로 읽어야 한다. ― 300쪽 〈8장 자연과 정정 가능성〉 중에서
우리는 언제나 잘못을 저지른다. 그래서 바로잡는다. 또 잘못을 저지른다. 이런 연쇄가 산다는 일이고 만든다는 일이고 책임을 진다는 일이다. 나는 오늘날 잔뜩 긴장한 채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 이토록 엄중하고 당연한 인식을 철학과 사상의 언어를 통해 떠올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써내려갔다. ― 345쪽 〈9장 대화, 결사, 민주주의〉 중에서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을 품고 이 글을 썼다. 이 책의 주제인 ‘정정 가능성’은 이 물음에 대해 현재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이다. 철학이란 과거의 철학을 이어받아 끊임없이 ‘정정’해나가는 작업이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만 ‘정의’, ‘진리’, ‘사랑’ 같은 초월적 개념을 안고 살아갈 수 있다. ― 346쪽 〈맺음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