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되고 불완전한 언어들은 어떻게 연대하는가
도쿄의 이방인, 조선인들이 발신하는 자유와 평등, 저항의 메시지
비모어(非母語)의 공간과 연대
이 책은 도쿄에서 발간되었던 『기독청년』, 『현대』, 『아세아공론』, 『대동공론』에 주목하여 트랜스내셔널한 연대의 면면을 좇는다. 이들 잡지가 발간되었던 1910~1920년대는 반제국주의적 담론과 실천이 왕성하게 전개되는 한편, 제국 일본의 무력적 팽창을 당연시했던 군국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이 책이 주목하는 잡지들은 이러한 모순적 상황 속에 놓였던 피식민 청년의 고뇌와 실천을 여실히 드러낸다. 잡지의 필자들은 도쿄의 이방인이자 피식민 지식인으로서, 그러나 동시에 천부(天賦)의 권리를 누려야 마땅한 보편적 존재로서 스스로를 정했다. 이들이 상상하는 연대란 식민지 조선을 한참 초월한 곳에 놓였다. 그리고 그 연대에 접근하기 위해서 이들에게 안락한 모어는 일단 차치되어야 했다. 이들은 비틀리고 서걱이는 발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들이 지향하는 연대의 상을 구축해 나간다.
연대의 자원과 경로
이 연대의 상을 해부하기 위해 저자는 연대에 결부되었던 담론적 자원과 물리적 자원을 폭넓게 검토한다. 이들의 연대담론에서 기독교는 보편적 권리로서의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며 반제국주의 논리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세계적인 기독교 청년단체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네트워크는 물적, 인적 자원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YMCA의 원조로 세워진 ‘청년회관’은 기독교청년회에 소속된 회원들뿐 아니라 모든 조선인 유학생들의 아고라이자 살롱이었다. 나아가 YMCA 네트워크는 민족을 초월한 교류를 촉진했으며,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동원할 수 있는 긴요한 자구책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사상적 자원으로서 기독교가 담지했던 범용성은 특장인 동시에 극복하기 어려운 결점이 되기도 했다. 이로써 인류애를 강조하는 기독교보다는 민족적, 계급적 전선을 선명히 하는 사회주의가 담론자원으로서의 인력(引力)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이상의 논의로 초국적 연대의 역사적 맥락은 한층 다층적이고 입체적으로 조망된다.
중층적인 발화의 장벽과 굴절, 그리고 저항
무엇보다 이 책은 이러한 연대담론이 발화를 가로막는 다종다양한 조건하에서 조성되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이들 잡지 곳곳에서는 재일본 조선인 잡지에 부과되었던 통어(統語)의 흔적이 발견된다. 예컨대, 법적, 관습적 차원의 검열, 조선어 잡지를 생산하는 데서 오는 경제적 곤란, 일본어라는 외국어가 주는 심리적 부담감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조건을 딛고 고유한 발화의 전략을 세련해 나간다. 검열주체가 가하는 압력과 여기에 맞서는 피검열주체의 발화 욕망은 지면 위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때로는 아슬아슬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전개되었던 이들의 발화가 제국의 언어와 통치 질서에 미세한 균열을 가하는 장면을 이 책은 예리하게 포착해 낸다.
초국적 연대의 성취와 균열
이에 더해 저자는 전인류를 지향하는 이들의 연대담론 내부에서도 파열의 조짐을 읽어낸다. 민족을 초월하는 평화로운 연대라는 당위적 명제는 다양한 필자를 흡인했지만 동시에 그 포괄성만큼이나 공소한 것이 사실이었다. 개별 필자가 내놓는 연대론은 서로 모순되거나, 심지어는 민족과 젠더, 인종 등 기존의 위계를 답습하고 강화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이 책은 다양한 논자들이 구성하는 연대론 속에서 식민지 조선이 어떻게 배치되거나 삭제되는지, 또는 상황에 따라 그 좌표가 어떻게 조정되는지도 눈여겨 살핀다. 이렇듯 조선이 지닌 아포리아로서의 속성은 연대론의 허점을 폭로하는 동시에 초국적 연대의 긴박함을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