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이자
다정한 정원가, 유쾌한 반려인
카렐 차페크 산문의 새로운 여정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와 함께 체코 출신의 위대한 작가로 손꼽히는 카렐 차페크. 차페크가 영국과 스페인을 여행하며 노트에 꾹꾹 눌러쓴 에세이와 직접 그린 사랑스럽고 창의적인 일러스트를 수록한 《대놓고 다정하진 않지만−카렐 차페크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영국 여행기》, 《조금 미친 사람들−카렐 차페크의 무시무시하게 멋진 스페인 여행기》를 국내 처음으로 선보인다.
차페크는 아무 데나 펴놓고 읽어도 삶의 근사한 비밀을 일러주는 소설 《평범한 인생》과 ‘로봇’이란 말을 탄생시킨 희곡 《R. U. R.》, 가드닝 분야의 고전이 된 에세이 《정원가의 열두 달》, 미워할 수 없는 개와 고양이에 대한 에세이 《개와 고양이를 키웁니다》 등을 통해 국내의 독자들에게도 독보적인 사랑을 받아왔다.
소설과 희곡에서는 주로 미래에 대한 비판이나 철학적인 성찰을 담은 반면, 에세이에서는 키득키득 웃게 만드는 유머와 영화처럼 펼쳐지는 생생한 묘사를 통해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과 번뜩이는 통찰을 전달한다. 특히 영국과 스페인이라는 미지의(차페크는 영국 땅에 발을 내딛고서야 자신이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라를 경험하며 남긴 여행기 속에 풍자와 유머, 동물과 자연, 인간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았다. 국내에 처음 번역된 이 두 권의 여행기는 다채롭고 위트 있는 차페크 산문의 매력을 가장 확실하게 느끼게 해준다.
인간이 무력하게 느껴지거나
뜬금없이 눈물이 터져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차페크가 부치는 유쾌하고 무해한 영국 편지
런던에서 창립한 국제 문학가 단체인 펜클럽과 프라하에서부터 알고 지낸 체코의 교육자 겸 언어학자 오타카르 보차들로의 끈질긴 초대로 영국을 방문한 차페크는 두 달여 동안 영국의 곳곳을 여행하며 여러 문학계 인사를 만난다. 문학계의 계속된 권유가 아니었더라도 조국이 나아갈 방향의 길잡이가 되어줄 민주주의 국가를 탐방하는 일은 지식인으로서 깊은 책임 의식을 느끼고 있던 차페크에게 간과할 수 없는 의무였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쾌하고 무해하기만 한 이 여행기는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정권의 폭압에 시달려야 했다. 정확히 100년 전인 1924년에 출간된 이 책은 1939년 나치 독일이 체코를 침공하면서 금서가 되었고, 1946년 복간되었으나 얼마 후 공산 정권에 의해 또다시 금지되었다.
영국에 도착한 며칠 후부터 펜을 든 차페크는 자신이 편집자로 일했던 체코의 일간지 《리도베 노비니》에 여행기를 연재했고, 이후 단행본으로도 출간해 즉각적인 인기를 얻었다.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평단에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영국의 주간지 《펀치》는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이래 우리 민족에 관해 쓴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했다.
잉글랜드부터 스코틀랜드, 북웨일스, 아일랜드까지 아우르는 차페크의 영국 여행기는 지루함과 떠들썩함, 인공과 자연, 부와 빈곤이 기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영국의 면면을 시니컬하지만 유머러스하게 파헤친다. 숨 막힐 듯 복닥거리는 런던의 거리와 정체가 일상인 도로를 보면서 인간성의 말살을 눈물겹게 걱정하고, 우울할 정도로 지루한 일요일을 견디기 위해 정처 없이 걷다가 하이드 파크 앞에서 다양한 연설자와 추종자들을 만나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특히 뛰어난 정원 에세이를 써낸 작가답게 “잉글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나무”라는 사실을 발견해내며 영국의 공원이 지닌 안정감, 어디로든 자유롭게 걸을 수 있다는 ‘기적 같은 가능성’에 감탄한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나무가 아닐까 합니다. 초원도 아름답고 경찰관도 아름답지만 그중에서도 으뜸은 등이 떡 벌어지고 풍성하며 자유로울 뿐 아니라 품위 있고 커다란, 오래된 나무들입니다.(15쪽)
차페크는 펜클럽과 보차들로의 주선으로 G. K. 체스터턴, 조지 버나드 쇼, 허버트 조지 웰스 같은 영국의 유명 작가들을 두루 만났는데, 짧은 인상기와 캐리커처 속에 담긴 작가들의 면면이 그들의 작품과 절묘하게 맞닿아 있어 웃음을 자아낸다. 버나드 쇼에 대해서는 “초인에 가까운 인사”라거나 “반은 신이요, 반은 (⋯⋯) 사악한 사티로스” 같았다고 묘사하며 두려울 정도로 “비범한 존재”였다고 회상한다. 어쩐지 ‘우물쭈물하다가’ 생을 망쳐버린 것은 아닐지 의심하게 되는 버나드 쇼가 실제로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할 줄 아는 생기 넘치는 인물이었음을 발견하는 일이 흥미롭다.
영국에서의 여정을 마친 책의 후반부에는 차페크가 《데일리 헤럴드》에 기고한 〈영국인들에게〉, 영국의 라디오에서 연설한 〈영국 라디오 방송용 연설문〉을 수록해 영국에 대한 차페크의 시선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게 했다.
영국의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은 이 책이 그 자체로도 훌륭한 여행기이지만 “중유럽 문화의 기록으로서 매우 중요하며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책” 가운데 하나라고 단언했다. 아울러 가벼우면서도 온화하며 어떠한 선동의 의도도 없는 이 책이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불안하고 힘든 시기를 겪는 이들에게 인간성을 잃지 않는 법을 일깨워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대놓고 다정하진 않지만》은 인간이 무력하게 느껴지거나 뜬금없이 눈물이 터져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차페크가 부치는 가장 유쾌하고 무해한 답신이다.
‘길 위에서’ 탄생한 편지들에 담긴
가장 아름다운 시절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영국은 서서히 패권을 잃어갔지만, 동시에 전쟁으로 무너진 일상의 균형을 되찾으려는 영국인들의 의지는 삶의 구석구석에서 귀중하게 빛났다. 더불어 차페크의 조국인 체코 역시 독립국가로서 불안하지만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차페크는 발전된 영국의 정치와 경제, 산업, 그리고 재건에 대한 희망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만, 마냥 동경하거나 체코의 현실에 좌절하지만은 않았다.
영국에서 저는 거대함과 막강함, 부유함, 번영, 비할 데 없는 발전상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아직 작고 미완성의 상태라는 사실이 결코 슬프지는 않았습니다. 작고 어수선하며 불완전한 것은 그 나름대로 용감한 사명이거든요.(186쪽)
“비할 데 없는 발전상”에서 인간의 미래를 되짚고, “작고 어수선하며 불완전한 것”에서 희망을 포착해내는 일은 차페크 문학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점 중 하나다. 차페크는 발전된 사회를 덮어놓고 찬양하거나 무기력하게 자신의 시공간을 폄하하지 않는다. 그래서 차페크에게 여행이란 어쩌면 지금 자신이 속한 공간과 현실을 재발견하고 새롭게 탈바꿈시키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차페크와 함께 영국의 구석구석을 천천히 걷다보면,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언제나 여기서 멀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