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도시 아카이브〉 시리즈로 거듭난
김시덕의 도시 답사, 그 네 번째 이야기
『한국 문명의 최전선』
도시 문헌학자 김시덕의 새 도시 답사기, 『한국 문명의 최전선』이 출간되었다. 지난 2018년 명불허전의 도시 답사기 『서울 선언』을 펴내며 〈도시 문헌학〉이라는 독창적인 분야를 개척한 그는, 『갈등 도시』(2019)와 『대서울의 길』(2021)을 연달아 펴내며 〈대서울〉이라는 화두를 한국 사회에 던진 바 있다. 그리고 이번 책 『한국 문명의 최전선』을 계기로 그는, 확장하는 대서울권의 경계를 살피는 동시에 그 너머 한국의 다른 지역으로 이어질 자신의 향후 행보를 예고한다. 한국 전역을 커버하는 장기 프로젝트로 거듭난 본격 도시 답사 시리즈, 바로 〈한국 도시 아카이브〉다.
한국 사회 백 년의 압축판, 경기·충남 서해안의 땅과 길
이번 책에서 다루는 경기 서남부와 충남 서부에 걸친 서해안 지역은 대규모 간척 사업으로 산업 형태와 교통망이 바뀌며 시민들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곳이다. 염전으로 쓰이던 해안은 농토로 변하고 또 공업 지대로 변하면서 땅의 쓰임도 크게 바뀌었다. 이렇게 교통이 변하고 땅의 쓰임이 바뀌어 온 이 지역의 변화는, 지난 백 년간 한국 사회가 겪어 온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경기와 충남 서해안권의 전반적인 변화 양상을 살피며 여정은 시작된다. 도로와 철도 연결이 미비하여 서울·인천 등으로의 왕래가 불편하던 과거에, 충남 서부 주민들은 인근 항·포구에서 뱃길로 인천을 오갔다. 그러나 그곳 해안가에서 간척 사업이 일어나며 항·포구가 사라지고 한편으로 장항선 철도 등 육로가 정비되면서, 지역에 따라 인천·서울과의 연결성이 개선되거나 오히려 악화된 경우가 발생했다. 그리고 21세기 들어 서해안고속도로가 놓이고 최근 서해선 철도까지 개통을 눈앞에 두면서, 이 지역은 또 한 번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이 과정들 속에서, 경기 서남부 및 충남 서해안 지역은 한국의 새로운 산업 거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산업 거점화하는 동시에 맞게 된 또 다른 시대적 변화가 있다. 바로, 신냉전 시대 도래에 따라 이 지역이 한국의 새로운 〈최전선〉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공산권 붕괴 및 개혁 개방 국면 이후 한국과 경제·외교적으로 비교적 가까워졌던 중국은, 최근 국제 정세 변화에 따라 다시 자유주의 진영과 대결 구도를 꾸리고 있다. 이에 따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중국과 마주하게 된 한국 서해안 지역이 실질적인 최전선이 되고 있다. 지난 시기에 충남 당진·서산 등의 해안에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산업 시설이 대규모로 형성되어 왔는데, 새로 생겨난 외교·안보상의 변수는 향후 충남 서해안권이 맞이할 또 다른 변화상을 예고하는 것일 수 있다.
미래 한국이 탄생하는 산업의 땅: 천안·아산·당진·서산
『한국 문명의 최전선』에서 답사하는 지역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대규모 매립으로 해안선이 변한 인천의 간석지 및 강화 등 인근 도서, 물길이 변하고 뱃길이 사라지며 변모한 고양과 김포 일대 등을 살핀다. 그리고 염전에서 공단이나 주거지로 변한 인천, 시흥, 안산 등의 해안 지역을 확인한 뒤, 〈미래 한국〉이 탄생하고 있는 경기 서남부 화성과 평택 서부로 발걸음을 이어 간다.
화성에서 평택을 지나 충남 아산·당진·예산까지 간척지로 이어진 이곳은 근현대에 방조제가 지어지며 형성된 거대한 평야 지대이다. 기존 주민은 물론 새로 유입된 피란민·빈민·수몰민 등이 농지로 일구어 낸 이 지역 곳곳은 1970년대 이후 산업 단지가 하나둘 들어선 이래, 현재는 한국의 주요·첨단 산업 시설이 자리하며 미래 한국 산업의 거점으로 성장하고 있다. 특히 경기 평택과 충남 아산·천안이 이루는 삼각 지대는 고속철도 건설과 반도체 벨트 형성으로 빠르게 도시화하고 있다.
이 일대에는 6·25 전쟁 이후부터 새마을 운동 시기에 걸쳐 기존 주민과 피란민 등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간척지, 농토, 농촌 마을 등이 곳곳에 자리한다. 1976년 충남도청에서 발행한 『새마을의 승자상』이나 과거 정부가 발행한 각종 새마을 운동 관련 문헌에서 주목한 이 마을들은, 충남 서부의 오늘을 있게 한 땅과 삶의 변화 흔적을 간직한 〈도시 화석〉으로서 매우 가치 있는 곳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한편 현재 대단위 공업 벨트를 형성하고 있는 태안반도 일대, 당진과 서산의 해안은 방조제 건설 이전에 이미 간척 사업으로 농토와 염전이 들어섰던 곳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 전후로 삽교천 방조제, 대호 방조제, 석문 방조제 등이 건설되면서 대규모 농토가 생겨났고, 다시 공업 지대로 변해 갔다. 아산만에서 태안반도에 걸쳐 형성된 이 공업 벨트는 제철, 자동차, 석유 화학 등 거점 산업의 핵심지로 발전했고, 대기업 계열의 산업 시설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저자는 한국의 주요 산업 지대로 변모한 이 지역에서 목격한 발전의 그늘도 아울러 전한다. 산업 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들과 부당한 처우에 신음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을 살피고, 산업 시설과 발전소 운영으로 생겨난 환경 문제와 그 이면에 도사린 고용 문제도 아울러 확인한다. 또한 행정 구역 승격과 인구 증가라는 목표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자치 단체의 무리한 행정 등도 지적한다.
대서울의 끝과, 그 너머 가능성의 땅: 예산·홍성·태안·보령·서천
저자는 당진과 서산을 거쳐, 근래 대서울권에 편입된 지역이자 그 끝이라 할 수 있는 예산과 홍성 등을 걸어 본다. 이 지역에는 근대화 과정에서 지역 발전에 모범을 보인 농민들의 사례와 그 흔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곳들을 살핀 저자는, 이어서 예산과 홍성에 걸쳐 조성되고 있는 내포 신도시와 인근에 건설 중인 서해선 건설 현장에 주목하며 이 지역의 미래를 예측해 본다. 서해선 완공 이후 서울과의 접근성이 한결 나아지겠지만 획기적인 인구 유입은 어려우리라는 전망, 한편 대서울권의 끝에 자리하게 되면서 많은 것이 달라지리라는 전망을 아울러 내놓는다.
예산과 홍성을 살펴봄으로써 대서울권의 진짜 끝을 확인한 저자는, 한 걸음 더 발을 내디뎌 태안과 보령, 서천까지 답사를 이어 간다. 태안 만리포는 해방 전 뱃길로 인천과 서울은 물론 평양, 일본, 중국 등지를 자유롭게 오가던 곳이지만, 방조제 건설로 항·포구가 소멸된 후 현재는 교통 환경과 산업 구조가 크게 달라져 있다. 태안 남부의 안면 지역과 긴밀한 생활권을 이루고 있던 보령에서도 수십 년간 크고 작은 간척 사업이 진행되어 지역의 경관이 바뀌었다. 한편 보령 남쪽의 서천군은 한때 대규모 간척 및 공업 단지 조성이 계획되었다가 무산되면서 도시화·공업화의 기회를 번번이 놓친 바 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땅〉 서천을 마지막으로, 〈한국 도시 아카이브〉 제4권 『한국 문명의 최전선』은 마무리된다.
책 마지막에서 저자는, 〈한국 도시 아카이브〉 제5권에서 답사를 이어 나갈 지역들을 예고한다. 오랜 세월 충남 서부와 인적·물적으로 이어져 있던 대전·세종·청주 등 〈중부권 메가시티〉 지역, 그리고 군산 등 전라북도 서부 소권이 그곳이다. 대서울권의 끝인 충남 서부를 지나, 한국 전역으로 차근차근 이어질 저자 김시덕의 행보. 〈한국 도시 아카이브〉는 그 기나긴 걸음을 독자와 함께 꾸준히 이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