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진짜 모르는구나?”
“자꾸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라 진짜로 사람들 그림자가 사라지고 있다니까.”
박하연이 답답하다는 듯 핸드폰으로 뭔가를 검색하더니 정오에게 보여주었다. 뉴스 기사였다.
일파만파, 걷잡을 수 없는 그림자 실종 (19쪽)
맑고 따뜻한 목소리였으나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정오는 남자가 내민 손을 잡는 대신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곧 그 기시감의 이유를 깨달았다. 남자의 머리카락 색에서 박하연이 만났다던 그림자 상인에 대한 묘사가 떠오른 것이다.
“혹시 그림자 상인인가요?”
“따로 제 소개를 할 필요는 없겠네요.” (33~34쪽)
로혼의 대답은 불길한 예감을 현실로 바꿔놓았다. 로혼이 말한 재앙의 때가 곧 임박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정오가 느낀 위기감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이었다. 정오가 아는, 그것도 아주 가까운 사람 중 하백과 만났지만 그림자를 팔지 않은 사람이 떠올랐다. (64쪽)
“그렇다면 이번엔 조금 다른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전태진은 피곤함을 느꼈으나 청년의 간곡한 태도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선생님 앞에 선생님이 느끼셨던 슬픔을 다른 사람들도 느낄 수 있게 하는, 이를테면 슬픔 버튼이 있다면 누르실 건가요?”
질문을 던진 청년은 다소 긴장한 얼굴로 전태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전태진은 순간적으로 물론이라고 답할 뻔했다. (92~93쪽)
“방법은 간단해요. 별이 지문을 가진 정오 씨가 태진 형님의 이야기를 타이핑하면 됩니다. 형님 이야기가 적힌 용지가 별의 불꽃을 피우는 불쏘시개가 되는 거죠.”
로훈의 말을 들은 전태진은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연신 마른침을 삼키는지 목울대가 꿀렁거렸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전태진이 무겁게 입술을 뗐다.
“역시 가장 슬펐던 기억을 말해야 하는 거겠죠?”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126쪽)
침대에 모로 누운 정오의 눈에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모래시계들이 보였다. 제각각 다른 크기의 모래시계였다. 정오가 제 삶을 엄격하게 통제하기 위해 사용했던 모래시계들은 이제 쓸모를 잃은 고물처럼 보였다. (157쪽)
하백이 로혼을 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갑자기 궁금해지네. 네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도 지금처럼 말할 수 있을지.”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안다는 거야?”
하백이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원한다면 들려줄 수도 있어.” (177쪽)
전태진은 정오를 데리고 부두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막다른 길인 붉은 등대에 이르렀다. 정오의 눈은 파란 바다를 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여전히 무너진 건물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 아래 하이철과 조우빈이 깔려 있었다고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로웠다. 자신 때문에 온 여행에서 자신만 살아남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2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