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이는 두 손으로 로봇을 들어 꼼꼼하게 살폈다. 팔다리 관절을 꺾고, 스위치를 찾아보고, 충전 단자를 관찰했다.
“이 크기에 손가락이 꺾이는 로봇도 있구나. 제품 번호와 제조사는 없고, 처음 보는 유형이야.”
“그래? 난 잘 몰라서……. 그런데 마치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말했어.”
“스스로 생각한다고? 인공지능이란 뜻이야?”
“자기가 살살봇 E33이라고 했어.”
p.23
알뜰 할인 상품 선반에는 채소들이 많았다. 겉 포장이 살짝 찢어진 양상추, 꼭지 끝이 시든 파프리카와 오이, 껍질이 거뭇해진 바나나, 겉보기엔 멀쩡한 식빵도 있었다.
냉장 식품 진열대에도 알뜰 할인 상품이 있었다. 성호는 스쳐 지나갔고, 다영이는 유심히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멀쩡한 건 하나도 없잖아, 이걸로 뭘 만든다는 거야?”
p.54
채원이가 먼저 한 입 떴다.
“응?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입 짧기로 소문난 채원이가 괜찮다고 하자 다영이도 샐러드를 한 입 먹었다.
“이상하다. 왜 맛있지?”
성호도 샐러드를 한 입 먹었다. 양상추는 아삭했고, 파프리카는 상큼했고, 오이는 시원했고, 바나나는 달콤했다. 게다가 요구르트가 이 재료들을 부드럽게 감싸면서 맛을 끌어올렸다.
p.64
만약 곡물을 수출하는 나라에서 허리케인이나 가뭄, 홍수처럼 자연재해가 생기거나 전쟁이 벌어지는 등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면 수입하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끼니를 못 먹는 일이 생겨요. 이런 상황을 식량 위기라고 불러요.
이런 식량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우리 식탁에 오르는 재료들도 이런 문제를 갖고 있을까요?
p.86
혼자 남은 성호는 살살봇을 꼭 껴안고 쓰다듬었다. 움푹 파인 뒤통수, 여전히 들리는 째깍째깍 소리, 이제는 멈춘 위이잉 소리, 깜박거리기 시작한 빨간 불빛, 살살봇 E33이라고 소개하던 목소리…….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특별했다.
p.131
점점 심각해지는 식량 위기를 어떻게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재래시장에서 장보던 경험을 녹여 내고 싶었습니다. 장을 볼 때 밀폐 용기를 가져가서 반찬을 담고, 채소는 비닐 없이 장바구니에 넣습니다. 흙이 묻은 채소는 얇은 에코 백에 따로 담습니다. 과일은 약간 흠집이 난 것으로 구입할 때가 많아요. 상하거나 무른 부분을 떼어 내고 먹으면 멀쩡하거든요. 쉽게 버리는 대신 흠집이 나고, 조금 무르고, 냉장고에서 자리만 차지하는 재료들을 이용해서 먹는 사람이 많아지면 식량 위기의 속도를 늦출 수 있어요. 그 경험으로 ‘지구를 지키는 요리’를 떠올렸지요.
_ 이야기를 시작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