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인 것에는 언제나 책임이 있다”
길들여진 야생동물을 돌보는 일의 기쁨과 슬픔
시작은 어릴 적 가족이 된 반려 강아지 몬돌이의 심장병이었다. 동생 몬돌이를 살리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로 수의사를 꿈꿨던 저자는 군 복무 시절 잠수사 생활을 하며 바닷속 자연에 매료되어 아쿠아리움의 해양 동물 수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꿈을 이뤘다는 기쁨도 잠시, 동물을 그저 진열 상품 취급하는 국내 동물원·수족관 업계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첫 직장이었던 아쿠아리움을 떠났다. 동물을 치료하는 법을 6년간 배워 동물 소비를 조장하는 시설에서 일하려니 부침이 적지 않았다. 열악한 진료 환경에서 제 손으로 살리지 못해 ‘새 상품’으로 대체된 수십 구의 동물을 향한 죄책감과 회한도 깊었다.
아쿠아리움을 떠나 동물병원의 응급 수의사로 일하며 해외의 야생동물 보호시설로 시선을 돌리던 차였다. 불법 곰 농장의 사육 곰을 도축 직전에 구조했다는 청주동물원 소식을 우연히 기사로 접했다. 동물원·수족관에 비해 선진화된 국내 소동물 진료 환경에서 보통의 수의사로 사는 삶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청주동물원 소식을 들으니 다시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인간에게 길들여져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야생동물의 더 나은 여생을 위해 노력하는 청주동물원에서 수의사 인생 2막을 열었다.
아쿠아리움의 신입 수의사 시절 스트레스로 인한 자해로 꼬리를 잃은 알락꼬리여우원숭이의 집을 지어주었던 기억, 국내 최초로 실내 사육장에서 태어난 아기 물범의 인공 포육을 위해 아빠 물범처럼 밤새 사육장에 누워 분유를 먹였던 일, 500킬로그램이 넘는 바다코끼리의 치과 수술을 위해 갈비뼈가 부러진 통증도 잊고 수술장을 지켰던 경험까지 기쁨과 보람, 안타까움과 후회 등 다양한 감정이 생생하게 담긴 그의 기록을 읽다 보면 동물과 교감하고 동물의 아픔에 동화되었던 저자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
청주동물원에서의 생활은 갈비 사자 바람이를 구조해 진료하고 청주동물원의 터줏대감인 암컷 사자 도도와의 합사를 추진했던 긴장감 넘치는 하루하루, 대형 고양잇과로는 국내 최초로 자궁 절제술을 받고 회복한 도도의 배를 다시 열고 수술해야 했던 때의 걱정스런 마음, 나이가 들어 이제는 자연 방사를 고려하기 어려워진 독수리들을 돌보는 안타까움으로 이어지고, 그 다정한 시선은 동물원 울타리를 넘어 동물원 밖의 야생동물에게까지 확장된다. 아쿠아리움에서의 기억과 경험을 채찍 삼아 청주동물원의 동물들이 건강하고 편안하게, 그러면서도 야생동물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매분 매초 고민을 거듭하는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면 나도 모르게 청주동물원의 동물과 사람들 모두에게 응원을 보내게 될 것이다.
반려동물이 주로 찾는 동물병원이 아닌 동물원의 수의사이기에 필연적으로 환자에게 사랑받을 수도 없고, 사랑받아서도 안 되는 서글픈 운명이지만 자신의 진료와 관리로 동물들이 조금이라도 기운을 내서 삶을 이어가기를, 인간을 향한 경계심과 야생성을 되찾아 자연으로의 방사를 고민해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매일 동물원으로 출근하는 변재원 수의사의 발걸음은 오늘도 기운차다.
“동물을 사랑하기 전까지 우리 영혼의 일부는 잠들어 있다”
세상 모든 동물의 행복한 삶을 바라는 수의사의 꿈
‘동물 입장에서 동물원은 필요 없다.’ ‘야생동물은 소유 대상이 아니다.’ ‘좋은 동물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를 비롯한 청주동물원의 세 수의사와 동물보호단체, 환경부가 모두 인정한 대원칙들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동물원을 전부 없애는 건 다른 문제다. 원칙이 그렇다고 당장 모든 동물원을 없앤다면 이미 인간에게 길들여져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5만여 마리의 동물은 어디로 가야 할까? 결국 지금 내릴 수 있는 최선의 답은 ‘동물을 위한 제대로 된 동물원’이다.
그 뜻에 따라 청주동물원의 진료사육팀장 김정호 수의사를 필두로 변재원 수의사, 홍성현 수의사, 십수 명의 사육사와 행정 담당자까지 전 직원이 열악했던 청주동물원의 개선을 위해 한 몸처럼 움직였다. 외래종의 자연 감소를 위해 중성화 수술을 시작하고, 방사장을 리모델링했다. 더 나은 환경을 갖춘 시설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동물 이소를 추진하는 한편 동물원에서 평생을 살다 죽음을 맞은 동물들을 추모하는 공간을 마련했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청주동물원은 서울대공원과 에버랜드 다음으로 서식지 외 보전기관으로 지정되는 데 이어 우리나라의 첫 거점동물원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이제 외래 동물을 구입해다 가두고 관람과 전시를 중심으로 하는 동물원은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변재원 수의사가 꿈꾸는 결말이다. 저자는 동물원이 사람의 놀이터가 아닌 동물의 놀이터가 되고, 아프고 병든 동물을 치료하는 병원이자 요양원, 인간에게 터전을 빼앗긴 토종 야생동물의 보호소가 되는 날까지 사람들이 동물원 동물의 삶에 관심을 갖고 부족한 점에는 비판과 질타를, 긍정적 변화에는 칭찬과 응원을 보내면서 그 꿈에 동참해 주기를 당부하며 책에 마침표를 찍는다. 동물을 좋아해서 동물원이 싫어진 사람이든, 나들이 철이면 즐겁게 동물원을 찾았던 사람이든 동물원 동물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알고 깊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저자의 간절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자신이 속한 세계의 소멸을 바라면서도 그 세계의 약한 존재들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 《이상한 동물원의 행복한 수의사》에는 그런 삶의 서글픈 아름다움이 녹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