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원전은 1598년 출판 등록된 셰익스피어의 《The Merchant of Venice》이고, 크레이그(W. J. Craig)가 편집해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1905년에 출판된 옥스퍼드(Oxford) 판이 번역의 기본 텍스트입니다.
주제와 인물− 외양과 실재의 괴리
《베니스의 상인》은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 인육 계약, 포샤와 바사니오의 사랑 이야기와 상자 선택 게임이 중심 플롯이다. 각 플롯은 자비와 관용, 사랑과 우정의 문제를 다각도에서 조명한다.
포샤는 아버지 유언에 따라 세 상자 선택 게임을 통해 구혼자들의 지혜를 시험한다. 금, 은, 납 상자의 겉모습과 내포된 의미는 일치하지 않고, 이미 마음을 정한 포샤는 바사니오가 올바른 상자를 선택하도록 힌트를 주며 불공정한 게임을 진행한다. 지혜롭고 현명한 캐릭터로 평가받아 온 포샤는 남편에게 순종을 약속하는 듯 보이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상황을 반전시키며 적극적 의지를 실천하는 인물이다. 이후 맹세를 저버리고 결혼반지를 남에게 줘 버린 바사니오를 추궁하며 남편에 대한 우위를 확보한다. 이때 정절과 사랑을 상징하던 반지는 빚을 담보하는 차용 증서처럼 또 다른 형태의 ‘계약’ 혹은 구속으로 작용한다.
바사니오는 상자 선택 게임을 지혜롭게 통과해 포샤를 아내로 맞이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재산과 외양에 현혹된 투기적인 인물이다. 상자 선택 게임이 내포한 외양과 실재의 괴리라는 주제가 각 인물의 성격, 행동과 연관되며 극은 인물의 입체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새뮤얼 존슨의 다음 논평은 아마 셰익스피어를 가장 적절하게 평가하는 글일 것이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삶의 체계를 움직이게 하는 보편적인 감정과 원칙에 따라 말하고 행동한다. 다른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개별적 인간이라면 셰익스피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종(種)이다.”
복수와 자비의 차이가 사라진 세상
1598년 출판 등록된 《베니스의 상인》은 1596년에서 1597년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된다. 1594년 잉글랜드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전의로 임명된 유대인 로페즈가 여왕을 시해하려는 사건에 연루되어 군중 앞에서 처형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서구 사회의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적대의 역사에서 ‘로페즈 사건’은 유대인 배척 감정을 고조시켰다. 많은 평자는 샤일록이란 인물을 창조하는 데 이러한 역사적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고 간주한다. 텍스트는 샤일록의 물질주의적 사고와 행동을 꼬집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샤일록의 행동이 그를 타자화한 베니스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임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에 대해 셰익스피어는 명확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샤일록이 한 개인이 아니라 유대인으로 존재하듯이 안토니오도 샤일록에게 한 개인이 아니라 유대 종족을 박해해 왔던 ‘기독교인’으로 존재한다. 안토니오에 대한 그의 증오는 한 개인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 전체 혹은 사회로 향해 있다. _43쪽
론서럿 고보조차도 자기 주인 샤일록을 “유대인 주인”, “악마”, “악마의 화신”으로 부른다. 샤일록은 그의 이름보다는 주로 유대인 또는 유대 놈으로 불리며(약 70회), 샤일록이란 이름은 단지 열일곱 번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_56쪽
겉과 속의 괴리 문제는 베니스의 법정 장면에서 포샤가 판결을 극적으로 이끌어 가는 데 사용하는 교묘한 법 해석에도 적용된다. 포샤는 법의 문자적 의미에만 충실한 채 그 함의는 배제하며 재판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한다. ‘살 1파운드’를 담보로 한 계약의 허점을 영리하게 파고들어, 살과 분리할 수 없는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말 것’이라는 조건을 내거는 것이다. 샤일록은 졸지에 원고에서 피고로, 기독교인의 목숨을 노린 가해자의 위치로 전락한다. 이는 기독교적 관용과 자비의 정신이 이방인 타자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현실을 보여 준다.
유대인은 독약을 먹어도/ 죽지 않는 줄 아시오?/ 우리에게 부당한 짓을 해도/ 복수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시오?/ 다른 여러 가지 일을 두고/ 우리 유대인은 당신들과 같소. _122쪽
이 작품은 기독교로 개종을 요구받고 전 재산을 몰수당한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유쾌한 낭만 희극으로만 읽을 수 없다. 그럴듯한 진실, 기만적이고 편협한 자비, 가혹하고 엄격한 정의가 난무하는 곳에서 공정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공작은 “우리 기독교인의 정신이 유대인의 정신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 주겠다”라고 말하지만 타자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복수 의지는 샤일록의 그것만큼이나 강하고 어쩌면 샤일록보다 교활하다. 이 작품에서 “모든 사람은 똑같다. 특히 서로에게 복수할 때는 더욱 그렇다”라는 지라드의 지적은 적절하다. _298쪽.
사랑과 관용의 낭만적 공간인 벨몬트는 어느새 불안과 긴장을 내포하고, 법의 공적 영역을 재현하는 베니스는 복수와 자비의 차이가 사라져 버린 세상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