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지 않는 모양인데, 너희 엄마를 죽인 사람, 네 할아버지라고. 서필환 원장. 그것 말고도 네가 알아야 할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어. 그리고 난 네게…….”
준현은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서툴렀다.
평소의 자신답지 않았다. 성춘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준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폐 때문인지, 말을 더듬어서 그런지, 나이에 비해 앳되고 좀 부족해 보이는 것을 제하더라도 기묘하게 자꾸 마음속의 터부를 건드리는 놈이었다. 그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에 대해 생각하다가, 조성춘은 문득 눈을 깜빡였다.
설마.
5년 전의 일은, 어쩌면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97쪽)
할아버지 그늘에 숨어 있는 동안에는 누구도 우리를 공격하지 못할 거야. 그 집에서 한 걸음이라도 걸어 나가면 바로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우리가 가는 걸음걸음 따라붙겠지만, 적어도 그 집의 담장 안에서는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화로울 거야. 고모도, 외삼촌들도, 왜 오빠 앞에 나타났는지 영문을 알 수 없는 그 장제일보 기자도 감히 우리를 건드릴 수 없을 거야.
집안은 서늘했지만, 습도는 낮지 않았다.
나현은 열을 재려는 양 간헐적으로 손을 저으며 힘없이 잠든 준현의 뺨에 이마를 대어보다가 그 어깨에 가만히 얼굴을 묻었다. 문득 어렸을 때 함께 읽던 그림책이 떠올랐다. 나현은 고개를 들어 준현의 책꽂이를 돌아보았다.
‘백조왕자’였지.
그 낡은 동화책의 뒤표지를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욱신거렸다.
오빠를 구할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떤 저주를 받아도 괜찮아. 그러니까.
오빠는 내가 지켜줄게.
(101~102쪽)
“나현…….”
준현의 눈동자에 희미한 공포가 어렸다. 그 공포가 조금씩 감출 수 없는 설렘과 욕망으로 바뀌는 것을, 나현은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알아. 이건 미친 짓이지.
이 숨 막히는 열대야 때문일지도 몰라.
난 그저 오빠를 너무 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걸 착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어쩌면 납치 같은 걸 당할 뻔하니까 머리가 돌아버린 걸지도 몰라.
아니, 이런 끔찍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니까 당연하게도 미치고 만 걸지도 몰라.
하지만 진심이야.
(2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