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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물론과 유물론

미디어의 물질성에 대하여


  • ISBN-13
    979-11-6684-323-5 (93130)
  • 출판사 / 임프린트
    세창출판사 / 세창출판사
  • 정가
    20,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4-05-08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그랜트 볼머
  • 번역
    김수철
  • 메인주제어
    철학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철학
  • 도서유형
    종이책, 반양장/소프트커버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52 * 225 mm, 336 Page

책소개

유물론(materialism)이란 물리적 물질성 ―기술, 실천, 또는 신체의 물리적 물질성― 이 리얼리티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matter)는 관점이다. 이 책은 미디어의 유물론에 대한 입문서이자 개입이다. 나는 이 책에서 물리적 물질성은 모든 미디어에 대한 연구에 있어 본질적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동시에 유물론적 전회(materialist turn)는 미디어연구와 문화연구의 과거 전통과의 단절이나 〔그에 대한〕 거부 없이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하고자 한다.

미디어의 물질성에 주목한다는 것의 의미는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하는 사람들 ―이 책의 독자인 여러분과 저자인 나와 같은 사람들― 이 대화의 의미를 생성하는 데 있어서 유일한 행위자라는 가정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말한다. 인간 행위자만을 물신숭배 하는 대신에, 우리가 살아가고 행위하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기술이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유물론적 미디어 이론의 근본적인 입장이다. 인간 행위자, 의미, 해석에 관한 질문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 행위자, 의미, 해석이 문제가 되고 이해 가능하게 되는 한계와 가능성들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미디어의 물질성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하여 강조할 필요가 있다.

 

목차

-차 례

 

옮긴이의 말

 

〈b〉서론〈/b〉 미디어의 물질성에 대한 (그리고 물질성 내에서의) 사유

 

〈b〉1장〈/b〉 재현과 수행

 

〈b〉2장〈/b〉 새김과 테크닉

 

〈b〉3장〈/b〉 공간과 시간

 

〈b〉4장〈/b〉 신체와 두뇌

 

〈b〉5장〈/b〉 객체와 정동

 

〈b〉결론〈/b〉 미디어의 물질성에 대한 열 가지 테제

 

감사의 말

 

참고문헌

본문인용

나는 이 책의 독자들이 미디어연구와 문화연구에서의 일반적인 개념들에 친숙할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이 책을 썼지만, 미디어연구의 기본적인 이론과 접근이 주로 사용될 것이기에 독자들이 이 분야의 전문가일 필요는 없다. 물질성을 정치적 개입의 장으로서 바라보는 실용적이고 이론적인 미디어연구의 기획, 이것이 이 책에서 독자들이 얻어 가길 바라는 바이다. 나는 이 책의 독자들이 미디어와 기술이 어째서 단순한 도구가 아닌지를 깨닫게 되길 바란다. 미디어는 불평등의 지속과 사회적 차이에 대한 관리가 문제시되는 영역이다. 오늘날, 불평등, 차별, 권력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기술의 물질성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물질성을 통해서 권력이 유지되고 지속되기 때문이다.

_〈b〉14쪽〈/b〉

 

크로프트는 가부장제의 상징일까? 크로프트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여성 게이머는 욕망되는 특정 여성의 이미지, (환원적으로) 남성 판타지에서부터 나오는 신체 규범을 명백하게 영속화하는 이미지에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호명된 것일까? 또는 여성 게이머는 텍스트의 능동적 “밀렵자(poachers)”로서, 크로프트의 외모를 규정하는 가부장제 규범에도 불구하고, 증진된 권리의 행위자로서 크로프트의 능력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이 〈b〉모든〈/b〉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그렇다”이다. 라라 크로프트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전파를 위한 장막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소비하는 미디어를 통해서 “권리 증진(empowerment)”을 발견하는 팬 행위의 장소이기도 하다. 크로프트는 정체성과 재현에 대한 상이한 쟁투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인 것이다. 

_〈b〉64쪽〈/b〉

 

그러나 왜 휴대폰 자체가 커뮤니케이션의 미디어가 아닌 새김의 미디어가 되는가? 많은 실제 사건 범죄 예능 프로그램의 인기로 인해 우리는 재판에서 특정 시간에 누군가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문서화하는 데 있어서 휴대폰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고 있다. 유명한 팟캐스트, 《시리얼(Serial)》을 예로 들면, 여기서는 살인 범죄 재판에서 사용될 증거를 재구성하는 데 엄청난 시간을 쓴다. 그 증거의 많은 부분은 휴대폰 통화가 어디에서 이루어졌는지를 문서화한 기록들과 연관된다. 휴대폰이 특정 행위, 그 시간과 장소를 문서화하는 수단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휴대폰이 위치를 문서화하는 데 사용하는 방법은 휴대폰이 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_〈b〉134쪽〈/b〉

 

다시 말해서, 디지털 기술은 광범위한 출처로부터 우리에 대한 데이터, 즉 대부분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데이터를 수집한다. 페이스북과 구글은 여러분이 어떤 웹사이트를 보고 어떤 광고를 보고 있는지, 그리고 여러분이 업데이트나 검색을 위해 무언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는지 등등을 알아낼 수 있다. 여러분이 어떤 것을 언제, 그리고 얼마나 오래 보고, GPS 데이터나 여러분의 IP 주소를 기반으로 여러분이 어디에서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얼마나 오래 사용하는지 등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회사들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행동에 대한 데이터를 감지하고, 감시하고, 새기도록 설계된 여러분의 컴퓨터나 휴대폰에 기반하여 여러분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셀 수 없이 많다.

_〈b〉199-200쪽〈/b〉

 

미디어는 특정한 감각에 집중한다. 전화는 청각을 강조하며, 사진은 시각을 강조한다. 미디어는 공간, 또는 시간에서 이러한 감각을 확장시킬 수 있거나, 또는 특정 감각의 사용을 허용치 않을 수 있다. 이것이 매클루언이 말한 “절단(amputation)”의 의미이다. 그리고 확장과 절단은 제로섬이 아니다. 예를 들어,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은 신체를 분리시키는 헤드셋의 사용을 필요로 하며, 이를 통해서 신체를 다른 “가상”세계에 위치시킨다. VR은 신체와 감각들을 외부로 확대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VR은 〔동시에〕 신체를 절단하여 그것이 존재하고 있는 물질적 공간으로부터 차단시킴으로써 그것을 고립시킨다. VR 헤드셋은 근본적으로 신체 감각을 재구조화(reorient)하면서, 이를 한편으로는 확장시키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절단하고 있는 것이다.

_〈b〉233-234쪽〈/b〉

 

예를 들어, 인종과 인종주의에 대한 삶의 경험은 어떤 객체는 현존하게 허용하는 반면, 다른 객체는 결코 물질화되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인종주의라는 비난을 부인하는 백인들에 의해 매우 자주 언급되는 “나는 인종을 보지 않는다”라는 구절은 인종이 물질화되도록 허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주장이 아니라, 특정한 객체와 관계가 인식 속에 등장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인종을 보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인종이라는 범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인종이 물질화하는 삶의 경험을 거부하고, 인종주의의 불평등을 영구화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인종”은 세계로부터 배제된 어떤 것이 되고, 그것은 인정되거나 이해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는 인종적 차이와 차별의 현실을 거부함으로써 인종주의를 영구화한다.

_〈b〉262쪽〈/b〉

 

우리는 미디어 유물론에 대한 간략한 개요의 마무리 지점에 다다랐다. 결론적으로 나는 미디어의 물질성에 대한 열 가지 테제를 통해 내가 제시한 몇 가지 핵심적인 사항들의 요약을 이 책에서 제공한다. 이 책은 단지 서론일 뿐이고, 이 테제들은 미디어의 물질성에 대한 최종 주장도 아니며, 미디어의 물질성을 정의하는 유일한 방법도 아닐뿐더러, 이 책에서 주장된 모든 것을 완전히 요약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실천 속에서,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어떤 다른 것이 될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시도이다.

_〈b〉311쪽〈/b〉

서평

새로운 게임의 출시를 알리는 영상과 함께 당신은 즉각적으로 당신이 플레이할 캐릭터의 외양을 살핀다. 그리고 그 외양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당신은 아마도 커뮤니티에 그 게임의 캐릭터에 대한 말들을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을 것이다. 그리고 게임의 제작진들이 특정한 메시지와 외양을 게임에 투입하느라 정작 중요한 “게임의 재미”를 놓쳤다고 말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보자. 그 게임이 재미 없다고 느끼는 데에 그 게임 캐릭터의 외양 또는 메시지가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왜 “게임은 재미만 있으면 된다”면서 캐릭터의 외양이나 메시지를 논하고 있는가? 게임성만 논해도 충분할 텐데 말이다. 당신은 “게임은 재미만 있으면 된다”면서 게임에 메시지를 담고, 자신들의 의도에 맞는 캐릭터를 넣으려는 제작진을 비판하지만, 결국 당신의 관념상에서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캐릭터성을 그들에게 요구하고, 그것에 어긋나는 캐릭터를 비방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또는 아주 의식적으로)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영속화에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당신은 게임에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부여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그와 반대되는 다른 이데올로기를 부여할 것을 요구하는 셈이다. 본질적으로 이처럼 당신이 어떤 것을 물질화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은 당신이 어떤 것이 의미를 갖도록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당신이 어떤 것이 물질화하는 것을 거부할 때, 당신은 그것이 의미를 갖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은 그러한 메시지와 외양이 게임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러한 외양과 메시지를 당신의 세계에서 배제하고 있다는 말이다. 

논지 전개를 보다 편리하게 하기 위해, 내 멋대로 당신을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남성으로 물질화해 보겠다. 이 경우 당신은 전쟁영화 같은 남성 중심 서사에 왜 여성이 나와야 하느냐고 묻는다. 실제로 그 전쟁에 여성은 없었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러한가?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전쟁을 바라보면서 전쟁터에서 싸우는 병사들만을 조명할 뿐, 그 전쟁에 관련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배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체스나 장기가 아니다. 전쟁은 실제로 전장에서 싸우는 병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가 주되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전쟁에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조장하는 정치인들이 있으며, 그들에 의해 가족을 전쟁터에 보내야 했던 가족들이 있다. 또 전쟁에는 필연적으로 점령지가 생겨나고, 그 점령지에는 당연히 점령군만 있지 않다. 당신은 이렇게 점령군에 의해 점령된 피점령지에는 필연적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주된 피해자 중 하나가 여성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전쟁영화를 보러 갔을 때, 당신은 이런 점령지의 피해자들이나 병사들의 가족만 나오는 영화에는 아마도 심각한 위화감을 느낄 것이다. 전투 신만 나오는 전쟁영화에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논지를 전개하면서, 내 논지 전개의 편이성을 위하여 순간적으로 당신을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한 남성으로 물질화함으로써, 내 논지에서 다른 이들을 배제한 셈이다. 이때 과연 어떤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가? 당신은 내가 전개한 논지를 읽어 오면서 이에 대해서 생각해 봤는가? 

여기까지 오면 당신은, 아니 그저 게임 하나 하자는데, 또는 영화 한 편 보자는데 무슨 그리 복잡한 이야기를 하느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는 실제로 당신에게 영향을 끼친다. 미디어는 당신의 세계를 재구성하고, 새롭게 변형시킨다.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미디어는 단순히 영화나 게임 같은 것에 머물지 않는다. 예컨대 텔레비전이나 신문 지상에서 언론은 무엇을 어떻게 물질화하는가? 그것들은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을 보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것은 보도하고 어떤 것은 보도하지 않는가? 보도의 양이나 내용의 깊이는 어떠한가? 모두 동등한가? 아니면 편향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그들이 우리 사회의 사건들을 보도하는 방식, 즉 어떤 것을 물질화하고 그럼으로써 의미를 갖게 만드는 방식에는 어떤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는가? 또는 미디어 간의 비교로 가 보자. 당신이 텔레비전 방송에서 보는 프로그램과 유튜브 같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보는 콘텐츠는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예컨대 당신이 보는 인터넷 사이트의 콘텐츠는 지상파 방송에도 나올 수 있는 성격의 것인가? 나올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나올 수 없단 말인가? 또 그것이 어째서 인터넷에서는 가능하다는 말인가? 이것들이 모두 미디어가 무언가는 물질화하고 무언가는 물질화하지 않음으로써 당신의 세계를 재구성하고 변형시키는 방식들이다. 미디어는 이처럼 무언가를 재현하고 수행함으로써, 당신이 무언가를 새기는 방식을 변형시키고, 당신이 공간과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을 재구성하며, 당신의 신체와 두뇌를 재배치하고 재구조화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당신이 어떤 것을 객체로서 대상화하는지가 곧 당신과 세계의 관계를 재정립한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이 미디어에 무언가를 요구할 때, 미디어 역시도 당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당신이 미디어에 무언가가 물질화하는 것을 배제하기를 요청할 때, 미디어는 당신의 세계에서 실제로 그것의 의미를 배제할 것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당신의 불쾌감은 그렇게 누군가의 존재를 부인하는 억압이 된다. 나는 지금 미디어에서 모든 존재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한계상, 미디어는 모든 것을 물질화할 수는 없다. 다만 미디어에서 무언가가 배제될 때, 또는 당신이 미디어에 무언가를 배제하기를 요구할 때, 실제로 배제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나는 어떤 캐릭터가 다른 인종 또는 다른 성별로 대체될 때, 당신이 그것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 역시도 또 하나의 배제가 작용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그러한 대체가 이루어질 때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이 물질화하고, 그럼으로써 무엇이 의미를 갖는지, 당신이 분명히 인식해야만 한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읽기로는 이것들이 바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러나 나의 독해는 당신의 독해와 다를 수 있다. 또한 저자의 의도와도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의 내용에서 무엇을 물질화하고 그럼으로써 의미를 갖게 했는지 역시도 선택과 배제가 작동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 글이 당신에게 무엇을 하는가이다. 내 글은 당신으로 하여금 이 책을 읽어 보고 싶게 하는가? 나의 목적은 거기에 있지만 답은 내가 내릴 수 없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당신은 무엇을 물질화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저자소개

저자 : 그랜트 볼머
그랜트 볼머(Grant Bollmer)는 현재 호주 퀸즐랜드대학교(The University of Queensland) ‘커뮤니케이션과 아트’ 학부의 교수(senior lecturer)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디지털 미디어이며, 감정 인지, 셀피, 밈, 인플루언서, 비디오게임, 모션 픽처, 가상현실과 공감 등의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 현상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The Affect Lab: The history and limits of measuring emotion(2023,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aterialist Media Theory: An introduction(2019, Bloomsbury), Theorizing Digital Cultures(2018, Sage), Inhuman Networks: Social media and the archaeology of connection(2016, Bloomsbury) 등이 있다.
번역 : 김수철
김수철은 미디어문화 연구자로 현재 한양대학교, 연세대학교 등에서 디지털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미디어 기술의 기술문화적 측면에 주목하면서 도시 공간, 모빌리티, 대중문화, 문화산업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오고 있으며 그 결과를 다수의 국내외 학술저 널에 출판했다.
주요 저역서로는 『모빌리티 인프라스트럭처와 생활세계』(공저, 2020), 『모빌리티와 인문학』(공역, 2019), 『마르크스, TV를 켜다: 마르크스주의 미디어 연구의 쟁점과 전망』(공역, 201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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