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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들의 숙제


  • ISBN-13
    979-11-306-5248-1 (03810)
  • 출판사 / 임프린트
    ㈜다산북스
  • 정가
    24,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4-05-03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박경리
  • 번역
    -
  • 메인주제어
    소설: 일반 및 문학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박경리 #장편소설 #토지 #죄인들의숙제 #소설: 일반 및 문학
  • 도서유형
    종이책, 양장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33 * 215 mm, 808 Page

책소개

“삶에 고통이 없었다면, 문학을 껴안지 못했을 것이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한국 문학사에 남긴 또 다른 걸작 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아우르며 격변하는 시대 속 한민족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 대하소설 『토지』. 한국 문학사에 다시없을 걸작을 남긴 작가 박경리의 장편소설이 다산책방에서 새롭게 출간된다. 원전을 충실하게 살린 편집과 고전에 대한 선입견을 완벽하게 깨부수어줄 디자인으로 새 시대의 새 독자를 만날 준비를 마친 이번 작품은 『죄인들의 숙제』다. 전쟁고아로 둘만 남겨진 이복자매간의 애증과 갈등을 통해 ‘가족’이라는 특수한 관계성 속에서 발현되는 인간의 본질과 죄의식의 문제를 다룬다. 시대적 배경은 1960~70년대로, 작가는 당시 급속한 도시화, 산업화로 인해 물질적 풍요를 최고 가치로 여기는 사회 풍조와 인간소외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쓰인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깊은 울림을 주는 이 작품을 통해 오늘날까지 생동하는 박경리 문학의 힘을 느껴보길 바란다. 출판사 리뷰 “제 삶이 평탄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삶이 문학보다 먼저지요.” 고전의 품격과 새 시대의 감각을 동시에 담아낸 박경리 타계 16주기 추모 특별판 1957년 단편 「계산」으로 데뷔해, 26년에 걸쳐 집필한 대하소설 『토지』로 한국 문학사에 거대한 이정표를 남긴 거장 박경리. 타계 16주기를 맞아 다산북스에서 박경리의 작품들을 새롭게 엮어 출간한다. 한국 문학의 유산으로 꼽히는 『토지』를 비롯한 박경리의 소설과 에세이, 시집이 차례로 묶여 나올 예정인 장대한 기획으로, 작가의 문학 세계를 누락과 왜곡 없이 온전하게 담아낸 의미 있는 작업이다. 이번 기획에서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중추를 관통하는 박경리의 방대한 작품들을 한데 모아 구성했고, 새롭게 발굴한 미발표 유작도 꼼꼼한 편집 과정을 거쳐 출간될 예정이다. 오래전에 고전의 반열에 오른 박경리의 작품들은 새롭게 읽힐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번에 펴내는 특별판에서는 원문의 표현을 살리고 이전의 오류를 잡아내는 것을 넘어, 새로운 시대감각을 입혀 기존의 판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책을 선보인다. 이전에 박경리의 작품을 읽은 독자에게는 기존의 틀을 부수는 신선함을, 작품을 처음 접할 독자에게는 고전의 품위와 탁월함을 맛볼 수 있도록 고심해 구성했다. 이전의 고리타분함을 말끔하게 벗어내면서도 작품 각각의 고유의 맛을 살린 표지 디자인으로, 독서는 물론 소장용으로도 손색이 없게 했다. 한국 문학사에 영원히 남을 이름, 박경리 문학의 정수를 다산북스의 기획으로 다시 경험하길 바란다. “나는 언니 불행의 제물이었던 거예요. 난 언니의 부속물도 꼭두각시도 아니란 말예요!” 관계를 통해 죄의식의 심층을 파헤친 박경리의 수작 『죄인들의 숙제』 다산북스에서 새롭게 출간된 『죄인들의 숙제』는 박경리의 또 다른 걸작이다. 이 작품은 1969년 5월 24일부터 1970년 4월 30일까지 《경향신문》에 총 288회에 걸쳐 연재되었으며, 이후 1978년 범우사에서 단행본으로 처음 출간될 때 ‘나비와 엉겅퀴’라는 제목으로 발행되어 오랫동안 해당 표제를 유지했으나, 최근 다시 원제목을 찾았다. 『죄인들의 숙제』는 『토지』 연재 중에 발표되었는데, 당시 박경리는 『토지』 집필에 전력하며 다른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었다. 이 때문에 이 소설은 박경리가 그간의 긴 침묵을 깨고 거의 3년 만에 발표한 새 작품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토지』 연재와 동시에 발표된 장편소설은 『창』(1970~71)과 『단층』(1974)까지 포함해 단 세 작품뿐인데, 세 작품 모두 ‘가족구성원 간의 관계’가 갈등의 중심이 된다. 이는 남녀 간의 사랑을 중심에 두었던 박경리의 기존 대중적 연애소설과는 궤를 달리한다. 이 시기 박경리는 ‘가족’이라는 특별한 관계성 속에서 비롯되는 “‘죄인 됨’의 상황”과 ‘죄의식’의 문제에 깊이 천착했는데, “마음대로 끊어낼 수 없”고 “서로에게 윤리적 책임과 의무가 발생”하는 동시에 “이성적 논리로 설명하기 어려운” 성질의 ‘사랑’(혹은 ‘죄악’)이 발현되는 “가족 관계”야말로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수없이 질문과 대답을 지속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복자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박경리의 작품은 『죄인들의 숙제』가 유일하다. “돈에 대한 집착”과 “아욕”이 강한 언니 희정과 “병적인 결벽증”을 지닌 동생 희련, 극과 극의 성격을 지닌 두 자매의 오랜 갈등을 “밀도 있게 형상화”함으로써 인간 본성의 문제를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박경리의 다른 소설과 비교해 주목해볼 만하다. 희정은 전쟁 중 폭격으로 한 팔을 잃고 불구가 된 몸으로 어린 동생을 돌보며 생계를 책임진다. 이후 희정은 과거의 “많은 희생”을 희련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정서적 학대에 가까운 폭언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또한 희련을 “소유물”처럼 여기며, 희련이 성인이 되었음에도 “그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독점하려 하고 희련의 부채의식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옭아맨다. 이 때문에 희련은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그로 인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희련에게 희정이 “불구자”라는 것은 “언니의 특권”이며 “치명적인 무기”다. “불구자로서 결혼할 희망이 없는 노처녀 희정의 존재”는 희련을 우울하게 하고, “자기만이 남과 같이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정상의 생활”을 하는 것을 “죄스럽게” 여기게 만든다. “살아가려면 살아남으려면 죄인이 돼야 하는 게요. 강하다는 것은 남을 먹는 일이며…… 진실을 외면해야 하는 일이며, 아니 죄의식을 갖지 말아야 하는 일인지도 몰라.” 죽거나 미치지 않고 살아남은 ‘죄인’들에게 박경리가 던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 희정과 희련의 갈등이 중심이 되는 한편, 남편 ‘정양구’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희련의 친구 ‘강은애’의 혼란과 정신병 발발, 은애의 오빠이자 재일교포 출신 사업가 ‘강은식’과 희련의 비극적 사랑은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을 이루며 더욱 심도 있게 주제의식에 다가간다. 희련과 절친한 친구 은애는 아이 옷을 사러 백화점에 나섰다가 남편 ‘정양구’와 불륜 상대인 ‘남미’의 다정한 한때를 눈앞에서 목격한다. 젊고 아리따운 소녀와 함께 있는, 평소와 전혀 다른 남편의 모습. “결혼은 자유이기보다 의무”, “애정이기보다 생활”, “부부란 생활을 위한 공범자”라고 생각하던 은애는 그날 이후 혼란에 빠진다. 희련과 달리, 은애의 죄의식은 스스로를 속이는 데 대한 것이다. 안락한 생활과 평범한 일상에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욕망을 외면하고 있다. “기계처럼 되풀이되는 일상”이 자기에게 “아무런 이상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점이 바로 “병적이 아닌가” 하고 은애는 문득 깨닫는다. “사람이 기계를 닮아간다는 것은 사람을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며,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변질되어간다는 것 이상의 병이 또 있을 수 있겠는가.” 문득 공허함에 휩싸인 그녀는 무엇 하나 욕망하지 않는 자신이 생명이 없는 ‘사물’처럼 여겨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 없는, 남 못지않은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지만 실상은 자신이 “뚜껑도 열어본 일이 없는 피아노”같이, ‘가정’이라는 구색을 맞추기 위한 ‘아내’ 혹은 ‘아이 엄마’라는 “물체”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결국 은애는 정신이상 증세가 악화되어 요양을 떠나게 된다. 이후 정양구는 각성하고 가정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동생의 상태를 걱정한 강은식은 귀국해 은애의 건강을 살피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희련과 강은식은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다. 희련은 그와 만남을 가지면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해방감을 느끼지만, 주변의 방해와 소문, 그로 인한 오해로 둘 사이가 멀어지면서 더 큰 절망에 빠진다. “사람을 믿는다면 그 믿음만으로 살 수 있을 거예요. 최소한 휴머니티가 있다면 그것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박경리 문학이 지향하는 인간애(人間愛)의 메시지 ‘죄의식’은 이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하지만 주인공들의 죄의식은 주관적인 양심에 기댄 것으로 그 범주뿐 아니라 처벌의 기준 역시 명확하지 않다. 실상 작품 속에서는 “병적인 결벽성”이 있는 희련과 은애 정도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행동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인물이 거의 없다. 주변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철저히 본인의 욕망에 충실히 행동한다. 도덕관념이나 윤리의식을 배제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어떤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것에 부끄러움이 없다. 이 때문에 희련과 은애처럼 더욱 죄의식에 시달리며 고통받는 인물이 있는 반면, 계속 그 행위를 반복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영위하는 이들도 있다. 이혼한 지 3년이 지났음에도 희련의 주변을 맴돌며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전남편 ‘장기수’, 재력가인 은식을 차지하기 위해 희련을 음모에 빠뜨리는 후배 ‘송인숙’, 호시탐탐 희련을 노리는 플레이보이 ‘최일석’ 등은 “순수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꿈꾸는 희련과 달리,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본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결혼제도’마저 “수지계산의 범주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이러한 모습은 인간관계뿐 아니라 인간 존재마저 물질화하는 세태 변화와 당대의 인간상을 작가가 예리하게 포착해내어 소설 속에 녹여낸 것이기도 하다. 1960~7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화폐 뭉치나 수표액에 따라 사람이 가치 지어지는” 분위기는 오늘날의 현실과도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박경리는 끝까지 인간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사람을 믿는다면 그 믿음만으로 살 수 있을 거예요. 설령 애정이 없는 존경만으로도. 괴롭겠지요. 견딜 수 없겠지요. 하지만 어떤 결함이 있다 해도 최소한 휴머니티가 있다면 그것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게 없다면 그건 생명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박경리는 결국 “이해하지 못할 죄는 없으며 결국 모든 인간이 죄인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죄의식’의 문제를 소환한 듯하다.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데서 비롯되는 측은지심, 즉 인간애(人間愛)의 메시지를 담기 위해 작가의 길고 긴 고뇌가 담긴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펼쳐 보인 것이다. 박경리의 문학이 오늘날까지도 깊은 울림을 주는 까닭은, 치열하게 고뇌하는 그의 문학 세계 기저에 ‘사랑(휴머니티)’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목차

1. 엉겅퀴꽃 2. 동행자 3. 눈 4. 성공과 실패 5. 모습 6. 붕괴 7. 최초의 남녀 8. 소용돌이 9. 이율배반 10. 수지계산 11. 빙하 12. 귀가 13. 두 종말 어휘 풀이 작품 해설

본문인용

‘숱하게 흘린 눈물이라고요? 견디기 어려웠던 고통이라고요? 많은 희생이라고요?’ ‘안 그랬었다고 하겠느냐?’ ‘천만에요, 천만에요! 그것은 모두 언니 자신을 위한 눈물, 언니 자신을 위한 고통이었어요. 나는 언니 불행의 제물이었던 거예요. 이런 값비싼 보상을, 그래요! 내 의지로 내가 살 수 없는 이런 처지를! 난 언니의 부속물도 꼭두각시도 아니란 말예요! 난, 나 혼자 걷고 싶은 거예요. 나도 이젠 삼십이 됐어요. 제발 언니, 언니 불행으로 날 묶으려 하지 말아요. 언니가 불행한 건 내 탓이 아니에요. 정말 내 탓은 아니란 말예요!’ ‘오냐, 이제는 너 똑똑하고나, 이제는 너 능력 있고나, 학식 있고 인물 좋고, 교양 있고 젊고나, 그래서 넌 내소박하는 권리도 있고, 너한테는 내가 버러지로밖에 안 뵐 거다. 오냐, 나는 병신이다. 추물이다. 무식하고 갈 데 올 데 없는 천둥이다. 그래 너 그 도도한 오늘이 절로 이뤄졌느냐? 저절로 네가 솟았냐?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 알고말고, 이 비참한 병신의 몸으로 널 어떻게 길렀는가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 모르면 내가 알리겠다! 거리거리를 싸돌아다니면서 알리겠다. 이 배은망덕한 년아!’ _1. ‘엉겅퀴꽃’ 중에서 “한번 서로가 만나면 헤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게 나의 원칙이야. 그런 뜻에서 난 옛날 사람들이 그런대로 잘 살아왔다고 생각해. 웬만큼 안 맞는 점이 있더라도 결혼은 자유이기보다 의무인 것 같고 애정이기보다 생활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따지고 보면 부부란 생활을 위한 공범자 같은 게 아닐까? 순수하고 절대적인 사랑이 한 부부 사이에서 지속이 된다는 것은 그것은 특별이야. 희귀한 경우지. 모두 일심동체 되기를 맹세하지만 눈 닦고 보아 그런 행복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대부분은 타인끼리 만나서 서로 여전히 고독한 게 부부이고 나 자신 결혼 생활을 하고 있지만 서로가 다 고독을 절도 있게 가누면서 생활에 보조를 맞추어나간다면 그저 원만하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_1. ‘엉겅퀴꽃’ 중에서 ‘언니야! 언니야! 함께 가! 무서워!’ 희련의 울부짖음은 희정에게 무슨 짓을 하든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갖게 하였고 피란지 부산에서 그가 노상 입버릇 같이 말하는 피눈물의 세월을 보냈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부산 바닥에서 껌팔이, 떡장사 별의별 짓을 다하여 희련을 굶기지 않았고 공부까지 시켰던 것이다. 괴로웠던 세월의 추억은 희련에게 낙인과 같은 것이었고 희정에게는 그의 생애에서 어쩌면 가장 보람 있고 그리워지는 세월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 희련은 고통스러운 채무자(債務者)요 희정은 자신이 딛고 선 자리가 절대적이 아니었다는, 그러면서 안간힘을 쓰는 외롭고 허무한 채권자(債權者)인 것이다. _1. ‘엉겅퀴꽃’ 중에서 희련이 시골 고모 집에서 돌아오는 들판 길에는 보랏빛 엉겅퀴꽃이 피어 있었다. 독초도 아니요 얼마나 소박한 꽃이었던가.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 없이 수수하게 핀 꽃, 다만 그 가시가 너무 억세고 꺾으려 해도 꺾을 수 없게 질긴 줄기, 홀로 피고 못난 탓일까. ‘불쌍한 언니, 가엾은 언니. 누구라도 좋다. 엿장수라도 좋고, 넝마주이라도 좋고, 언니가 마음을 열어주고 또 상대가 착하기만 한 사람이라면 난 무슨 짓을 해서라도 공주를 만들어주고 왕자로 만들어주겠는데…… 불쌍한 언니…….’ _1. ‘엉겅퀴꽃’ 중에서 은애는 일 년에 한두 번쯤 자신과 정양구의 부부 관계를 생각해보는 일이 있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다지 불편이 없는 기계적인 생활이라는 느낌이요, 다음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어김없이 돌아가는 기계처럼 되풀이되는 일상(日常)이 자기에게 아무런 이상(異常)을 일으키게 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점이 병적이 아닌가고 의심해보는 일이다. 기계가 고장이 없다는 것과 사람이 고장이 없다는 것은 다르다고 은애는 막연히 생각해보는 것이다. 사람이 기계를 닮아간다는 것은 사람을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며,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변질되어간다는 것 이상의 병이 또 있을 수 있겠는가. _2. ‘동행자’ 중에서 “난 뭐야? 도대체 난 뭐란 말이야. 희련이 말했었지. 난 거짓에 대해선 관대하다고. 바로 그거야, 그거. 그 말 이상으로 내가 무위한 존재라는 표현이 달리 있을까? 원만하다는 것은 세상을 수월하게 살아간다는 얘기도 되고 인생을 깊이 느낌으로써 형성된 인격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난 그 어느 것에도 속해 있지 않아. 또 난 뭐라 했었지? 밥 한 끼를 위해 수모를 당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고 했었다. 그러니까 이 바람 없는 지대에서 냉장고와 함께 앉아 있고 피아노와 함께 앉아 있는 나는 냉장고하고 다른 것이란 말이야? 피아노하고 다른 것이란 말이야? 가소롭다! 밥 한 끼를 위해 수모를 당하는 사람보다 낫다는 우월감이 말이다! 그네들에겐 슬픔이 있고 노여움이 있을 텐데, 난 냉장고같이, 피아노같이, 뚜껑도 열어본 일이 없는 피아노같이, 난 물체야! 물체거든.” _2. ‘동행자’ 중에서 ‘누군가를 미워해야겠다! 누군가를 사랑해야겠다! 나쁜 짓이라도 해야겠다. 욕망을 가져야지. 옛날같이 뼈가 으스러질 만큼 고통을 받아야지. 그렇지 못하다면 난 이 집에서 피아노가 될 수밖에 없다. 냉장고가 될 수밖에 없어! 나는 어머니가 될 수도 아내가 될 수도 없어! 이런 상태로는. 난 누군가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아니면 내 자신의 욕망을 위한 노예라도 되어야 한다.’ _2. ‘동행자’ 중에서 ‘어머니, 어머니! 내가 사는 이유, 그거 하나만 알게 해주세요. 지금 난 어거지떼를 써서 살고 있는 거예요. 난, 천 번 만 번 생각해도 그이하곤 살 수 없어요. 아기 낳고 살다 보면 살아지는 거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서도 행복한 젊은 부부, 젊은 엄말 보면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 밀려난 것 같구…… 난 여자도 될 수 없고 엄마도 될 수 없고 죽는 날까지 고아로만 있을 것 같은 생각만 들어요.’ 희련은 어둠을 향해, 목에까지 차오르는 무섬증과 적막에서 헤어나기 위한 주문처럼 지껄였다. ‘무의미하다는 것, 목적이 없이 막연하다는 것, 그건 정말 무서운 거예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돈을 모으고 그래서 늙어지면 편안하게 안락의자에 앉아서 졸며 죽음을 기다리는 그게 행복이고 평화라는 언니 생각은 잘못이에요. 그건 밥벌레의 일생이에요. 개미나 꿀벌도 그렇겐 살 줄 아는 거예요. 난 언니같이 살고 싶진 않아요. 거지가 되어 비참하게 어느 골짜기에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난 내가 사는 이유를 발견하고 싶어요. 한순간일지라도 난 절대적인 상태 속에 서고 싶은 거예요.’ _5. ‘모습’ 중에서 남미가 그다지도 쉽사리 마음을 바꿔놓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았고 몸으로 느껴버린 지금, 정양구는 자기 자신 속에서도 남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쉽사리 사라져 가는, 한때는 사랑하였던 여자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유행가의 가락 같은 사랑의 어설픔을 그는 느끼었던 것이다. 어쩌면 정양구는 남미뿐만 아니라 은애도 잃을지 모른다. 아니 영혼이 병들어버린 은애는 벌써 정양구에게 잃어진 존재였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미는 텔레비전과 진주 목걸이 쪽으로, 말하자면 살기 편리한 곳으로 가버렸다.’ 정양구는 한 여자를 잃은 것이다. ‘은애는 피아노나 냉장고가 될 수 없다고 늘 지껄였지. 편리하고 합리적이라는 생활이 그를 잡아먹었다.’ 정양구는 여자인 동시 인간과 인생을 잃은 것이다. _6. ‘붕괴’ 중에서 ‘지금 그 여자가 열심히 좇고 있는 건 대체 무엇일까? 과연 무엇일까? 그 여자는 무지무지하게 시끄럽고 바쁘고 규격화된 문명 속에서는 패배자도 승리자도 그 어느 것하고도 관련이 없을 것 같다. 은애는 자기모순 때문에, 그리고 또 뭣인가 오늘의 소음에 부딪쳐 보고 미쳤지. 그가 말했다. 냉장고가 될 수 없고 피아노가 될 수 없다고, 그렇게 되기까지는 정양구나 한현설이라는 반쪽과 반쪽만의 사내들 속에 끼어들어 자기모순에 빠지고 자기 혼란에 빠지고 감정은 분열되고, 거기에 자극한 것이 금속적인 소음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감정 분열이 없는 너무나 명백한 것이 탈이다. 그게 싫었었지. 만일 처남을 그 여자가 좋아한다면 어떤 결과가 될까? 편협하고 여유가 없는 여자, 손바닥만 한 자기 세계를 꼭 쥐고 놓으려 하지 않는 여자, 너무 명백하다. 저 차량의 무거운 바퀴는 그 여자를 살해할지는 몰라도 미치게는 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남 보기는 얼마나 아슬아슬한가.’ _8. ‘소용돌이’ 중에서 “미스 윤도 언제꺼정 혼자 살 순 없을 거고, 여자는 뭐니 뭐니 해도 남편이 있어야, 자식 낳고 가정 지키는 게 그게 최고란 말이야. 제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여자는 여자, 타고난 대로 살아야지. 그렇게들 안 하니까 무리가 생기는 거야. 사실이지 여자가 혼자 살면 아무 구속 없이 퍽 자유로운 것 같지만 말이야, 실상은 그렇지 않다거든. 내 친구가 하나 있는데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오기로 위자료를 받고 이혼을 했단 말이야. 혼자 되고 보니 막막하기도 하려니와 오빠하고 같이 나가도 아무개가 연애한다는 소문이 나고 조카를 데리고 나가도 젊은 애송이하고 놀아난다는 소문이 나고, 비로소 그 친구는 세상이 무서워졌다는 거야. 남편의 그늘 밑이야말로 자유로운 곳인 것을 깨달았다는 거지. 그 후론 도무지 겁이 나서 조카고 오빠고 남의 남자로만 보여 옴쭐달싹할 수 없어 서둘러 재혼을 했지만 말이야.” _8. ‘소용돌이’ 중에서 ‘나를 면박할 자격이 당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한눈을 팔았을 적에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했던가요? 당신은 당신의 부인하고 밤을 함께하지 않았느냐 말예요. 아, 아니지요. 그보다 당신은 이미 우리가 서로 사랑했을 적에도 이중의 밤을 가졌던 거예요. 그래 놓고 당신은 나를 멸시할 수 있겠어요? 나를 창부로 취급할 수 있겠느냐 말예요. 그야말로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보고 흉보더라고, 도대체 당신의 그 독설은 뭐냐 말예요. 남자라는 것만으로 만사를 합리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걸 비겁하다고 생각 안 하시냐 말예요.’ 실제 무심한 채 앉아 있는 남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정양구는 자신이 남미의 처지가 되어 마음속으로 남미가 함직한 말을 중얼거려보았던 것이다. ‘남자라는 것만으로 만사를 합리화할 수 있다?’ 제가 중얼거렸던 말을 정양구는 되받아서 씹어본다. 오랜 습관이며, 풍토이며, 불문율, 그것에 자신도 젖어 있었던가, 질투는 고통 이외의 혐오감이 따른다는 것은 항용 여자에게만 문죄(問罪)되어온 그 오랜 풍토 탓이었을까. _8. ‘소용돌이’ 중에서 “당신이 저하고 결혼한 동기도 함께 생각했어요. 누굴 한 번 좋아했다면 그것으로 애정은 끝난다는 묘한 착각 같은 것에 사로잡혔던 거예요. 생활이다, 생활이다 하고 생각했던 거지요. 타협하고 적당히 균형을 잡아가며 살아가는 거라구 말예요. 그건 어거지였어요. 나 지금도 정직히 말하면 쓸쓸한 거예요. 당신 마음 다 가지지 못하는 것, 당연하면서도 투정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그렇게 충격을 받는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나쁘다고 할까요. 비인간적이라 할까요. 그런 사람이었다면 저는 당신을 경멸했을 거예요. 사람한테 참된 모습이 없다면 함께 살 수도 없지요. 그건 애정 이전의 거예요. 당신이 저를 사랑하지 않건 그 일 이전의 문제 아니겠어요? [……] 전 당신을 사랑해요. 지금 전 정말 질투를 하고 있으니 말예요. 옛날엔 질투 같은 것 해본 일 없었어요.” 정양구는 여전히 자는 체 누워 있었다. 은애는 남편이 잠이 들었는지 깨어 있는지 개의치 않았다. 깨어 있으면 말을 듣고 있을 것이며 잠이 들었다면 독백으로도 무방한 것같이 보였다. “사람을 믿는다면 그 믿음만으로 살 수 있을 거예요. 설령 애정이 없는 존경만으로도. 괴롭겠지요. 견딜 수 없겠지요. 하지만 어떤 결함이 있다 해도 최소한 휴머니티가 있다면 그것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게 없다면 그건 생명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_13. ‘두 종말’ 중에서 “잘 죽었다, 잘 죽었어. 그따위 성질 살아서 뭘 해? 죽어 마땅하지.” 은애가 넋두리할 때마다 정양구는 벌컥벌컥 화를 내곤 했었다. “성질 땜에 죽었나요?” “그럼 왜 죽었어!” “악인들이 둘러싸서, 악인들이 죽인 거예요!” “악인들은 없다. 기운 센 놈들이 있을 뿐이지.” “희련은 죽은 게 아니에요! 죽인 거예요! 한 사람이 그 앨 죽였나요? 여러 사람이 덤벼들어서 죽였지. 오빠도 살인자의 한 사람이에요! 내가, 내가 다시 보는가! 죄인들이야! 범죄자들이에요!” “아무도 죽이진 않았어. 살 수 없으니까 죽은 거요. 살 힘이 없어 죽었지. 그렇지, 살아가려면 살아남으려면 죄인이 돼야 하는 거요. 강하다는 것은 남을 먹는 일이며…… 진실을 외면해야 하는 일이며, 아니 죄의식을 갖지 말아야 하는 일인지도 몰라.” _13. ‘두 종말’ 중에서 ‘사람도 많고 창문도 많고 자동차도 많다!’ 정양구는 걸으면서 담배를 붙여 물었다. 죽음의 사태가 연방연방 나건만 그러나 도시에는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변한 것이 있다면 사람은 더 많아지고 상황은 보다 복잡해졌다는 것이요, 많아지고 복잡해진 거대한 도시는 사회면의 요란한 기사를 깔고 문대며 더욱더 태연자약해져 가고 있다는 점이다. 무신경해져 가고 있다는 점이다. _13. ‘두 종말’ 중에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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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저자 : 박경리
박경리 朴景利 (1926. 12. 2.∼2008. 5. 5.)
본명은 박금이(朴今伊).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으로 등단, 이후 『표류도』(1959), 『김약국의 딸들』(1962), 『시장과 전장』(1964), 『파시』(1964~1965) 등 사회와 현실을 꿰뚫어 보는 비판적 시각이 강한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9년 9월부터 대하소설 『토지』의 집필을 시작했으며 26년 만인 1994년 8월 15일에 완성했다. 『토지』는 한말로부터 식민지 시대를 꿰뚫으며 민족사의 변전을 그리는 한국 문학의 걸작으로, 이 소설을 통해 한국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거장으로 우뚝 섰다. 2003년 장편소설 『나비야 청산가자』를 《현대문학》에 연재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중단되며 미완으로 남았다.
그 밖에 산문집 『Q씨에게』 『원주통신』 『만리장성의 나라』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생명의 아픔』 『일본산고』 등과 시집 『못 떠나는 배』 『도시의 고양이들』 『우리들의 시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등이 있다.
1996년 토지문화재단을 설립해 작가들을 위한 창작실을 운영하며 문학과 예술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현대문학신인상, 한국여류문학상, 월탄문학상, 인촌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했고 칠레 정부로부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문학 기념 메달을 받았다.
2008년 5월 5일 타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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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콘텐츠그룹은 정약용 선생의 애민정신과 실사구시를 시대정신으로 삼아 2004년 2월 창업한 종합 콘텐츠 기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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