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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들


  • ISBN-13
    979-11-306-5249-8 (03810)
  • 출판사 / 임프린트
    ㈜다산북스
  • 정가
    18,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4-05-03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박경리
  • 번역
    -
  • 메인주제어
    소설: 일반 및 문학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소설: 일반 및 문학
  • 도서유형
    종이책, 양장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33 * 215 mm, 372 Page

책소개

“삶에 고통이 없었다면, 문학을 껴안지 못했을 것이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한국 문학사에 남긴 또 다른 걸작 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아우르며 격변하는 시대 속 한민족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 대하소설 『토지』. 한국 문학사에 다시없을 걸작을 남긴 작가 박경리의 장편소설이 다산책방에서 새롭게 출간된다. 원전을 충실하게 살린 편집과 고전에 대한 선입견을 완벽하게 깨부수어줄 디자인으로 새 시대의 새 독자를 만날 준비를 마친 이번 작품은 『타인(他人)들』이다. 전쟁 트라우마와 죄의식의 문제를 다룬 이 작품은, “민족적 비극으로 초래된 개인의 상처는 치유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성찰이 담긴 작가의 대답이기도 하다. 추리소설적 구조를 통해 대중성과 묵직한 주제의식을 흥미롭게 풀어낸 이번 작품을 통해 박경리 문학의 색다른 면모를 느껴보기를 바란다. 출판사 리뷰 “제 삶이 평탄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삶이 문학보다 먼저지요.” 고전의 품격과 새 시대의 감각을 동시에 담아낸 박경리 타계 16주기 추모 특별판 1957년 단편 「계산」으로 데뷔해, 26년에 걸쳐 집필한 대하소설 『토지』로 한국 문학사에 거대한 이정표를 남긴 거장 박경리. 타계 16주기를 맞아 다산북스에서 박경리의 작품들을 새롭게 엮어 출간한다. 한국 문학의 유산으로 꼽히는 『토지』를 비롯한 박경리의 소설과 에세이, 시집이 차례로 묶여 나올 예정인 장대한 기획으로, 작가의 문학 세계를 누락과 왜곡 없이 온전하게 담아낸 의미 있는 작업이다. 이번 기획에서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중추를 관통하는 박경리의 방대한 작품들을 한데 모아 구성했고, 새롭게 발굴한 미발표 유작도 꼼꼼한 편집 과정을 거쳐 출간될 예정이다. 오래전에 고전의 반열에 오른 박경리의 작품들은 새롭게 읽힐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번에 펴내는 특별판에서는 원문의 표현을 살리고 이전의 오류를 잡아내는 것을 넘어, 새로운 시대감각을 입혀 기존의 판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책을 선보인다. 이전에 박경리의 작품을 읽은 독자에게는 기존의 틀을 부수는 신선함을, 작품을 처음 접할 독자에게는 고전의 품위와 탁월함을 맛볼 수 있도록 고심해 구성했다. 이전의 고리타분함을 말끔하게 벗어내면서도 작품 각각의 고유의 맛을 살린 표지 디자인으로, 독서는 물론 소장용으로도 손색이 없게 했다. 한국 문학사에 영원히 남을 이름, 박경리 문학의 정수를 다산북스의 기획으로 다시 경험하길 바란다. “시시한 얘기야. 사랑이 어디 있어? 모두 타인들이면서…….” 애정소설인가, 추리소설인가? 박경리의 알려지지 않은 수작 『타인들』 다산북스에서 새롭게 출간된 『타인들』은 박경리의 또 다른 걸작이다. 이 작품은 1965년 4월 《주부생활》 창간호부터 이듬해인 1966년 4월호까지 총 13회에 걸쳐 연재된 장편소설로, 1980년 지식산업사에서 『애가(哀歌)』(박경리문학전집 9)와 함께 묶여 출간된 바 있다. 단독으로는 이번이 첫 출간이 된 셈이다. 『타인들』은 추리소설의 형식을 띠는데, 도입부터 독자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소설은 을지로에 있는 어느 흥신소에 묘령의 여인(‘이문희’)으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남편(‘하진’)이 “저녁이 되면 반드시 밖으로 나갔다가 밤 열두 시에 집으로 돌아오는” 습관이 있다며, 그가 매일 밤늦게 어디를 갔다 오는지 캐내달라는 의뢰를 한다. 여타의 소설에서 흔히 짐작되는 “가정불화”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이들 부부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문희와 하진은 결혼한 지 10년 차지만 ‘타인들’처럼 지내는 중이다. 남편 하진은 문희에게 ‘수수께끼’ 같은 존재다. 아내에게 무관심하고 집에서는 안방 대신 침실 겸 서재에만 틀어박혀 아무 표정도 말도 없이 생활한다. 그러면서도 밤마다 ‘까마귀 떼’와 관련된 잠꼬대를 하며 악몽에 시달리는 하진. 문희는 그런 남편의 모습에 호기심과 불안을 느끼며 흥신소를 통해 그 비밀을 알아내려 한다. “서로가 다 불순하죠. 마음속에는 서로 다 다른 곳에 고향을 두고 있으면서 말예요.” 영혼의 허기에 시달리는 이들의 애증과 욕망, 질투와 외로움…… “영원한 평행선”을 그리는 마음들은 과연 이어질 수 있을까? 문희는 남편의 이상 행동이 그림을 그리지 못함으로써 화가로서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예술가의 괴벽”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문희의 의뢰를 받은 흥신소 소장 ‘김주원’은 하진의 행적을 따라갈수록 그의 ‘비밀’이 여자관계 같은 단순한 것이 아님을 확신한다. 사실 하진은 과거에 저지른 어떤 끔찍한 범죄로 죄의식에 시달리며 ‘현재의 삶’이 피폐해진 상태다. 한국전쟁 때 국군으로 참전해 지리산 토벌대였던 전력이 있는 그는, “나는 짐승이었고 지금의 나는 마약중독자”라고, 그때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천재 화가로서의 명성도 잃고, 심지어는 아편중독으로 환각에 시달리며 주변인들에게도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등 정신이상자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 하진은 말한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인간성마저 부정하는 게 전쟁이요.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전쟁을 할 순 없어”라고. 하진은 전쟁 트라우마로 인간에 대한 기대를 버린 지 오래로,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며 ‘모조리 생존 본능만 남은 동물로만 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학하듯, 미국 유학 후 귀국한 문희의 친구이자 라이벌 관계인 피아니스트 ‘강경옥’과 동침하고 그녀에게 고가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는 등 위악적인 행동을 이어나간다. 문희는 하진의 외도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하진이 아내인 “자신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으로 자조하며 부부 관계를 지속해 나가지만 불행하고 공허할 뿐이다. 문희의 오빠인 ‘문영’과 올케 ‘현숙’, 하진의 이복동생인 ‘하영’과 두 형제의 후원을 받는 베일에 쌓인 소녀 ‘정애’, 하영의 연인 ‘미혜’, 한때 문희를 흠모했던 ‘염기섭’ 등 주변 인물과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문희와 하진의 오해는 점점 더 쌓이고 갈등은 고조되어 간다. 한편 문영과 하영은 또 다른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이기도 하다. 매부인 하진이 소유한 토지를 빼앗으려는 문영과 현숙 부처의 탐욕, 문희를 향한 ‘경옥’의 질투와 허영, 동생의 처지는 안중에도 없이 경옥을 꼬드겨 성적,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문영의 동물적 욕망, 하진을 향한 하영의 열등감과 증오 등 다른 한 축에서 벌어지는 돈과 질투, 애증이 얽힌 치정극은 소설의 재미를 더하고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말씀해주세요, 당신의 죄가 무엇인가를. 애정을 바라지는 않겠어요. 다만 당신을 알려주세요.” 진실한 반성과 고백을 통한 죄의식의 극복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박경리의 응원의 메시지 문희와 하진의 문제는, 후반부의 「바닷가에서」에서 해소된다. 그 바탕에는 하진을 향한 문희의 애정과 그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다. 문희의 절실함에 응한 하진은 혼자만의 비밀로 품고 있던 과거의 범죄와 죄의식, “내부에서 뒤틀리고 있던 무서운 고독과 고통”을 문희에게 털어놓는다. 마침내 이 ‘고백’이란 행위를 통해, 하진은 “말을 하고 나니 속이 후련”해지고 “중병을 앓다 일어난 사람”처럼 “시원”하다면서, “피 냄새”와 “까마귀”를, “그 얼굴”을 잊을 수 없어 괴로워하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잠든 것처럼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며 해방감을 느낀다. 그 고백을 들은 문희는 “그를 위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런 고통을 받고 혼자서” 시달렸을 하진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며 말한다. “당신은, 당신은 다시 살아날 수 있어요. 당신은 괴로움을 저에게 나눈 거예요. 작품을 하세요. 이제부터 그림을 그리시란 말예요.” 둘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거리를 두게 한 하진을 둘러싸고 있던 “짙은 안개”의 정체를 알게 된 문희는, 자신이 남편을 그동안 “강한 인간”으로 오해했던 것을 깨닫는다. 하진의 본성이 “얼마나 심약하고 선량한”가를 새삼 깨달으며, 문희는 “전쟁이 빚은 악몽”으로 인해 “이 땅에 사는 우리들” 모두가 “많건 적건” “상처”를 떠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건 우리의 죄가 아니”라고, ‘당신은 죄를 지은 게 아니다’라고, “억울하게” “우리 민족” 모두가 “죄 없이 형벌”을 받았을 뿐이라고 위로하며 전쟁이 남긴 끝없는 형벌과도 같은 현실에 다시금 몸서리친다. 그리고 본시부터 예술가였던 하진에게 다시 “작품을 하”라고, 이제부터 “그림을 그리시”라고 말한다. “당신은, 당신은 다시 살아날 수 있어요. 당신은 괴로움을 저에게 나눈 거예요.” 치유의 시작은 사랑이 바탕 삼는 공감과 연대 박경리가 내놓은 대답은 ‘휴머니티’ 하진의 진실된 고백이 있고 난 뒤, “하진과 문희는 그 암흑의 사장에서 마치 이 세상에 최초로 태어난 인간”처럼 모래밭을 “구르며 지껄이고 눈물 흘리곤” 한다. 그리고 부부로 맺어진 지 10년이 지난 뒤에야, 서로로 인해 “처참”해진 뒤에야 비로소 이들 부부는 “그들의 분신을 얻은” 것처럼 “환희에 젖”는다. 바닷가에서의 그 일이 있기 전, 애정 없는 결혼 생활에 지친 문희가 ‘염기섭’을 만나 속을 털어놓는 장면이 있다. 염기섭은 오랫동안 문희를 마음에 품고 홀로 흠모하며 잊지 못하는 인물이다. 문희는 “이 세상엔 아무도” “저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며 ‘하진과의 이혼 생각’을 언급한다. 하지만 “이혼한 후”에도 하진을 “잊지는 못할 거”라고 하자, 염기섭은 문희를 말리며 “잊을 수 없고 사랑하면서도 헤어져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되묻는다. 작중 염기섭의 말처럼, “이 세상에 제일 못난 짓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 남이 볼 때는 “병신스러운 유치한” 일이지만, 또한 “늙고 젊고 간에 여전히” “갈망하는 이상한 것”이기도 하다. 문희는 그 말을 듣고 “저라는 여자는 너무 자아의식이 강한 편이었으니까, 그분의 비밀도 고통도 함께 모조리 감싸서 그 속에 자기를 잃어버리는 그런 여자는 될 수 없었”다며, “그분의 비밀은 무엇이었는지, 그분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그 신비스러움에 이끌리면서도”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고문”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렇기에 하진의 고백에 따른 문희의 진심 어린 공감과 위로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문희가 하진을 짓누르던 무거운 죄의 무게를 함께 나눔으로써 하진이 과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한 것은, 결국 문희가 그를 조건 없이 ‘사랑’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남[他人]’이지만 마음을 열고, 그가 저지른 ‘죄’보다는 ‘하진’이라는 한 인간 자체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포용하려 했던 ‘타인’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소설 말미의 “모두 한 시절 진통을 겪듯 괴로워한 일들은 꿈같이 되어버렸다. 그 상처들을 아주 잊을 수야 없겠지만 세월은 그 흔적을 엷게는 해줄 것이다”라는 문장은, 이 작품을 “전쟁 후일담 소설”로서 연결지어 생각해보게 한다. 또 한편으로는 역설적으로 “헐벗은 내 조국”을 휩쓸고 지나간 한 시대의 민족적 비극을 ‘세월이 엷게는 해줄지라도’ 영원히 잊지는 못하리라는 작가 박경리의 말을 대신하는 듯하다. 이 작품을 통해 박경리가 보여준 숭고한 인간애와 휴머니티의 묵직한 감동은 쓰인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독자들에게 큰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

목차

서울흥신소 방문객 애인 악몽 다시 등장하다 변하지 않았군요 언덕 밑의 풍경 미치광이의 선물 장미원(薔薇園) 어떤 사나이 출판기념회 여창(旅窓) 농장 평행선 밤길 병약한 소녀 대면 그들의 애인과 아내들 비둘기의 집 사랑의 형태 허(虛)한 반발 예기치 못한 결과 바닷가에서 종결 작품 해설

본문인용

“용건은?” 하고 사나이는 짤막하게 물었다. 문희는 핸드백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어 난롯가 탁자 위에 놓는다. “이분의 행방을 좀 알아야겠어요.” 사나이는 사진을 들고 본다. 삼십오륙 세가량 되어 보이는 남자, 사나이는 사진에서 눈을 떼고 문희를 바라보며, “실종되었습니까?” “아니에요.” “그럼?” 문희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똑똑하다. “여덟 시에서 열한 시 반까지,” 하다가 말문을 닫는다. 사나이는 다음 말이 나오기까지 기다려준다. “어디에 가 있는지 그걸 알고자 합니다.” 13쪽 “가정이라구요? 사막이죠. 그건 차라리 없느니만도 못한 걸 거예요.” 문희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넌 가끔 그런 말을 한다만 우리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네가 욕심이 많은 것 같다. 그만하면 그 사람이야 너에게 잘하는 편 아닌가.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평생 아이 없다고 탓하는 말을 하나, 결혼생활 십 년에 군말 한마디 없는 남편을 두고 왜 그러니.” 문희의 얼굴이 해쓱해진다. “그이가 애기를 원하는 줄 아세요?” “그러니까 마침 잘되지 않았어?” 문희는 찌그러진 미소를 띤다. “그이가 이 세상에서 털끝만 한 애정이라도 바라는 줄 아세요?” “애정은 주는 거야. 받는 건 아니거든. 바라지 않고 주기만 한다면 여자로서 행복한 것 아니냐.” [……] “털끝만치도 바라지 않는 사람이 털끝만치라도 남에게 애정을 베풀 것 같아요?” 19쪽 ‘어제 오빠보고 난 피아노 위에 먼지가 쌓였다고 했었지. 피아노 위에만 먼지가 쌓였을까? 내 몸뚱이에도, 내 영혼에도 무수한 먼지가 쌓여, 쌓이고 또 쌓여서, 난 어떻게 하지? 누가 그러더라? 절망했을 때보다 막연해졌을 때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더 많이 느낀다고. 나는 지금 막연하다. 뭣을 붙잡지 않는다면, 그것이 절망적인 일이라도, 아주 비극적인 일이라도…….’ _‘방문객’ 중에서 ‘오빠는 지금 손짓발짓하고, 흥분했을 거야. 정말로 눈앞에 황금덩어리가 흘러가기라도 하듯. 그칠 줄 모르는 탐욕, 그것 이 남자가 지니는 힘의 상징인지도 몰라. 그런데 언니는 또 어떻고? 그 냉담한 성격에 남편의 사업을 돕는 일이라면 온갖 애교를 다 부릴 수 있는 여자지. 모두 다 살아 있다. 거짓이라도 좋아. 나에게도 누군가가 정열을 좀 준다면 이렇게 무의미하게 먼지에 쌓여 앉아 있지는 않을 거야. 미움이라도 좋고 노여움이라도 좋다.’ 26쪽 “큰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별안간 그의 목소리가 크게 터져 나왔다. “뭘?” 문희는 어리둥절해서 상대편을 본다. 격한 듯한 목소리와는 반대로 그는 웃고 있었다. “형수씨는 오핼 하고 계시단 말입니다. 제가 욕심 없는 놀량패로 보입니까? 천만에요. 얼마나 큰 욕심, 야망 뒤에 절벽이 기다리고 있어도 나는 한번은 그것을 해치울, 해치울 것입니다. 틀림없이 한번은.” “궁금하군요.” “조금도 궁금하지 않으면서, 궁금한 일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 “서울흥신소에는 뭐 하러 가셨죠?” 조용히 물었다. 문희의 얼굴이 해쓱해진다. 38쪽 “아까 당신은 말씀하시길, 까마귀는 요즘 집착하고 계시는 그림의 주제라 하셨죠?” “…….” “그럼 이상해요.” 하진의 눈이 더욱 번득인다. “당신은 전에도, 아주 전에도 까마귀의 잠꼬대를 하신걸요.” 하진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주먹을 휘두르며 문희를 칠 듯 무서운 얼굴이 되어, “내가 싫어하는 말은 묻지 말어.” 집이 흔들릴 만큼 고함을 지른다. “나는 나, 너는 너야! 남의 마음을 다 제 것으론 못 한단 말이야!” 다시 고함 소리가 집을 흔드는 것 같다. 문희는 엎드려 울 음을 터뜨린다. 지금까지 그렇게 노한, 무서운 하진의 얼굴을 본 일이 없다. “앞으로 두 번 되풀이했다간 이혼이다!” 68쪽 하진은 이내 길모퉁이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는 순간 문희는 그를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은 절망에 사로잡힌다. 코트 깃을 세우는 뒷모습에서 느낀 충동적인 애정의 감동이 아직 전신에 일렁이고 있는데 숨이 막히게 엄습해오는 절망, 너무 절박하여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뒷모습까지도 신경질적이야.’ 중얼거리며 문희는 가까스로 뜰 안에 들어온다. 문을 닫아걸고 뜰 안을 지나온다. 눈앞이 캄캄해질 만큼 절박했던 그의 마음과는 반대로 문희 얼굴에는 이상한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실로 오래간만에, 짓누르는 듯한 권태에서 놓여난 감정의 변화, 그것에서 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72쪽 ‘무엇이 그 옛날의 내 기쁨, 그 감동을 앗아갔을까. 나는 십 년 동안 무엇을 향해 투쟁을 했을까? 이제는 이렇게 지치고 힘이 다 빠져버렸는데…….’ 빈 마음을 향해 몹시 허우적거려온 십 년의 세월, 문희는 그동안 소중한 자기 재능이 못 쓰게 되고, 음악에 대한 맑은 신앙과도 같았던 마음이 이제는 자기에게 한 오리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절감한다. ‘얇삭한 영혼으로, 예술에 대한 두려움 없는 허영으로, 그런 경옥이 지금은 당당한 피아니스트로 귀국을 하였다. 음악에 헌신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나는 지금 허수아비 같은 한 사람을 잡고 메아리도 없는 혼자 넋두리로 온종일, 온종일을 허무하게 보내고 있지 않느냐. 도시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78쪽 포 소리가 멎은,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침묵의 전선…… 무엇이 일어날 것이다. 시시각각으로 무엇이 다가오고 있다. 아아, 수천 마리의 까마귀 떼들이 날아내린다. 날갯소리가 소나기 같구나. 온통 하늘이 까맣다. 푸른 구멍, 하늘 구멍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구나! 수, 숨이 막힌다. 아, 저, 저 마구 날아올라 가는구먼! 눈알을 다 빼먹은 까마귀 떼들이 날갯짓을 하며 춤을 추고 있다. 눈알이 빠져버린 송장이…… 그, 그런데 살아서, 숨이 붙어서 팔을 휘젓고 있지 않느냐! 102쪽 “도둑이 제 발소리에 놀란다더니, 아 그래 유명한 음악가에 대해서 내가 뭐라 하든가요? 내 남편하고 연애하느냐고 물어본 기억은 없는데, 뭐가 더럽고 치사스럽소? 그거 어디 한번 물어봅시다. 뭐가 치사스럽고 더러운지.” 현숙이 경옥 앞에 바싹 다가서며 따진다. 일하던 일꾼들이 일손을 멈추고 비웃음을 띠며 구경을 한다. ‘밥 잘 처먹고 헐 일 없는 족속들의 심심찮은 치정극 구경이나 하자.’ 그런 투의 눈초리다. 146쪽 “경옥이가 당신에게 이겼다는 말은 하지 않습디까?” 웃는 얼굴을 돌리며 하진은 문희를 쏘아본다. “무슨 뜻이죠?” 문희는 그를 올려다본다. “난 경옥이하고 동침했어! 다이아몬드 반지도 선사했지!” “네?” “당신 올케처럼 질투하겠소?” 문희는 숨을 마신다. 심술이 잔뜩 오른 하진의 눈이 잔인하게 문희의 눈을 주시한다. “시시한 얘기야. 사랑이 어디 있어? 모두 타인들이면서…….” 이번에는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하진은 문을 거칠게 열고 나가버린다. 151쪽 “하기야 예술하는 사람들의 감정이란 유치하게 예민하고 약하니까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 그림을 못 그리는 화가의 고통이 얼마나 비참한가, 그것은 당사자들이 되어보지 못하는 한 모릅니다. 그러나 왜 하 선생이 그림을 못 그리는가 그것에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원인…… 게다가 그리지 못하는 고통, 두 가지가 겹쳐서…… 거의 발광 상태니까요. 오늘 같은 경우, 하 선생은 언제나 교수실을 들어올 때는 적군들 속에 들어오는 그런 눈초리를 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는 아무도 그에게 도전하지 않는데도 역습하려는 그런 태도로 바뀌어졌단 말입니다. 그의 뒤통수에 총이 겨누어진 듯 홱 돌아서며 그 자신도 총을 뽑으려는, 마치 그런 자세란 말입니다. 부인께서는 요즘 하 선생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셨습니까?” 179쪽 그가 나가자 문희는 얼굴을 감싸고 소리를 죽이며 흐느껴 운다. 울면서도 문희는 자신이 진정 슬퍼서 울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청승스럽게 훌쩍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운다는 사실과 문희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별개의 상황과 별개의 존재 같은, 정말 이상한 착각 속에 그 자신이 빠져들어 가는 것을 느낀다. 마치 손발이 저리는 것처럼 마음이 저려서 감각을 잃어가는 것과도 같이. ‘아무리 심각해 봐도 쇼 같은 것 아니냐?’ 운다는 사실과 문희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은 더욱더 뚜렷하게, 그리고 그 사이를 이루는 거리는 강물의 폭 이 넓어지는 것처럼 자꾸만 넓어져서 마침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컬어지던 타인이라는 언어가 실로 자기라는 한 인간 속에서도 엄연히 대좌하고 있는 것을 문희는 소름 끼치게 깨닫는다. ‘온갖 것은 다 거짓이다. 슬픔이나 기쁨이나 행복 같은 것도! 아 아니, 정말 연극이란 말이야!’ 208쪽 “나는 문희가 행복하리라 생각했는데.” 염기섭은 푸듯이 뇐다. “불행해 보이죠?” “…….” “저는 남이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어요. 다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면 왜 사는지…….” “그렇게 살다니?” “타인 말예요.” “타인…….” “선생님은 부인을 타인이라 생각하세요?” 염기섭은 잠시 머쓱해진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사랑하고 안 하고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모순된 말인지는 몰라도…… 타인이라는 사실은 정말 엄연한 사실일까요? 물론 사실일 거예요. 하지만 따로따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을 믿는다면 도시 인간은 무엇일까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절망 외에 무엇이 있을까요?” 213쪽 “이 세상에 제일 못난 짓이 사람을 사랑하는 거구, 병신스러운 유치한, 남이 볼 땐 말이지. 그러나 늙고 젊고 간에 여전히 그것은 갈망하는 이상한 것이거든. 잊을 수 없고 사랑하면서도 헤어져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잊을 수 없는 것하고 사랑하는 것하고 다르다고 생각해요. 전 그분을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요? 아마 사랑했다면 그분의 알 수 없는 면이 너무 많았던 탓이었을 거구, 잊을 수 없다는 것도 아마 그 점 때문일 거예요.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분 역시 무의식적인 헌신을 바라지나 않았을까요? 저라는 여자는 너무 자아의식이 강한 편이었으니까, 그분의 비밀도 고통도 함께 모조리 감싸서 그 속에 자기를 잃어버리는 그런 여자는 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분의 비밀은 무엇이었는지, 그분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그 신비스러움에 이끌리면서도 그것은 저에게 견딜 수 없는 고문이었어요. 이젠 그 고문에 이겨볼 수 없는 지경까지 왔어요.” 218쪽 “나는 당신을 놓아주는 게 옳을 게요.” 하진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애당초부터 나는 결혼할 자격도 없고 여자를 사랑할 처지도 아닌 인간이었소. 그런 뜻에서 나는 문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오. 나는 가장 근본적인, 부부로서 가장 근본적인 희생을 당신에게 강요해온 셈이지. 누구, 다른 여자를 사랑했던…… 때문에 그런 것은 물론 아니오. 나는 이미 나 자신을 포함하여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인간은 모두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소. 내가 작품을 못 하는 이유는 거기 있는 거요.” - 224쪽 “정애!” 그는 정애를 덥석 안았다. “사, 사랑해!” 정애는 몸부림을 치며 하영의 얼굴을 할퀴었다. “나하고 농장에 가서 조용히, 조용히 살어. 넌 이젠 어른이야. 아무도, 아무도 다른 사람 생각은 안 하는 거야. 정애가 없어지면 난 살인을 할지도 몰라. 정말 악마가 될지도 모른단 말이야.” 하영은 정애의 가냘픈 몸을 양팔로 죄며 열에 들뜬 사람처럼 지껄였다. “불쌍한 정애! 너는 내 살, 내 뼈, 내 심장이다.” 327쪽 “나는 지리산 토벌대에 있었어. 그 까마귀, 무수히 많은 까마귀, 괴뢰군이 있는 곳에도 언제나 까마귀 떼들이 몰려 있었거든. 이쪽에선 그 몰려 있는 까마귀만 보면 그곳에 괴뢰군이 틀림없이 있는 걸 알아차렸지. 까마귀는 맨 먼저 죽음의 냄새를 맡은 거야. 싸움이 끝나고 거기 가보면 까맣게 내려앉은 까마귀, 미처 숨도 끊어지지 않은…….” 338쪽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갔어요? 그건 전쟁이 빚은 악몽이에요. 우리들, 이 땅에 사는 우리들 어느 누구 한 사람 전쟁의 상처를 안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 많건 적건. 그건 다 우리의 죄가 아니에요. 우리의 죄가 아니구말구요. 당신은 죄를 진 게 아니에요. 다만 형벌을 받았을 뿐이에요. 억울하게 형벌을 받았을 뿐이에요. 죽은 사람 산 사람 모두가 다, 우리 민족이 다, 우리 민족이 다 죄 없이 형벌을 받았던 거예요. 여보, 왜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339쪽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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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저자 : 박경리
박경리 朴景利 (1926. 12. 2.∼2008. 5. 5.)
본명은 박금이(朴今伊).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으로 등단, 이후 『표류도』(1959), 『김약국의 딸들』(1962), 『시장과 전장』(1964), 『파시』(1964~1965) 등 사회와 현실을 꿰뚫어 보는 비판적 시각이 강한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9년 9월부터 대하소설 『토지』의 집필을 시작했으며 26년 만인 1994년 8월 15일에 완성했다. 『토지』는 한말로부터 식민지 시대를 꿰뚫으며 민족사의 변전을 그리는 한국 문학의 걸작으로, 이 소설을 통해 한국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거장으로 우뚝 섰다. 2003년 장편소설 『나비야 청산가자』를 《현대문학》에 연재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중단되며 미완으로 남았다.
그 밖에 산문집 『Q씨에게』 『원주통신』 『만리장성의 나라』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생명의 아픔』 『일본산고』 등과 시집 『못 떠나는 배』 『도시의 고양이들』 『우리들의 시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등이 있다.
1996년 토지문화재단을 설립해 작가들을 위한 창작실을 운영하며 문학과 예술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현대문학신인상, 한국여류문학상, 월탄문학상, 인촌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했고 칠레 정부로부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문학 기념 메달을 받았다.
2008년 5월 5일 타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THE JOY OF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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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콘텐츠그룹은 정약용 선생의 애민정신과 실사구시를 시대정신으로 삼아 2004년 2월 창업한 종합 콘텐츠 기업입니다.
출판 분야를 포함해 디지털콘텐츠, 엔터테인먼트, 교육, 뉴미디어 등 다양한 콘텐츠 사업에 도전하며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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