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키가 쑥쑥 자란 아이들이 세현의 기록을 앞지르기 시작하면서, 대회에 나갈 때마다 순위가 한 칸씩 아래로 내려갔다. 꽤 무서운 일이었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리에서 멀어진다는 건.
그리고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아무리 노력해도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세현은 여전히 땅꼬마였고, 기록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중학생이 된 후로는 단 한 번도 시상대에 서지 못했다.
만년 오등.
그게 세현의 별명이었다. 결승전까지는 진출하지만, 시상대에는 서지 못하는 오등. 운이 좋아 누군가가 실수를 한다 해도 사등밖에 하지 못하는 불운한 선수.
_16쪽
“인간, 영혼을 달래는 음식을 먹고 싶지 않나? 내가 아주 맛있는 식당을 알고 있는데, 같이 가는 게 어때?”
“지금 네가 말하는 거야?”
세현은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되물었다. 까마귀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세현을 보았다.
“그럼 여기 누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_26쪽
“맛있어요!”
“진짜로요?!”
“네! 이게 왜 맛있지?”
세현은 정말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맛있으면 안 되는 음식이 맛있는 게 이상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맛있더라도 탕후루 떡볶이라는 괴상한 요리가 세상에 존재해도 되는 것일까? 정어리 파이만큼이나 괴식인데.
“후아아.”
데몬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터뜨렸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양팔을 옆으로 뻗었다.
“맛있게 드셨으니, 손님께 환상을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_37쪽
파주주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니 주인님께서 작은 주인님을 걱정하시는 겁니다. 악마란 자고로 피도 눈물도 없이 냉혹해야 하는 법. 그런데 작은 주인님은 마음이 너무 여려요. 고작 인간을 동정하다니요? 장차 마계의 주인이 되실 분이 말입니다.”
데몬은 입술을 삐죽였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부모님을 닮지 않았다는 말도, 후계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도.
_76쪽
“혹시 추천해 줄 수 있어? 아니면 네가 가장 잘 만드는 거.”
“네가 먹고 싶은 걸 주문해야지. 그러려고 오는 식당이잖아.”
“……그렇긴 하지.”
지영이 씁쓸하게 대꾸했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데몬은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영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지영은 결국 어깨를 움츠리며 데몬을 힐끗 쳐다보았다. 데몬이 답을 정해 주길 바라듯.
그때 낯선 목소리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기가 뭘 먹고 싶은지도 모르는 인간이군.”
_93쪽
지영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느라 자신의 생각은 뒤로 미뤄 두기만 했다. 그게 익숙해져서 이제는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뭐, 이제라도 찾으면 되지.”
데몬은 그리 큰일이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꾸했다.
“일단 하나는 알고 있잖아. 소고기뭇국을 좋아한다는 거.”
_138쪽
“김밥 나왔습니다, 손님.”
민준은 삐딱한 눈으로 김밥을 응시했다. 그리고 맛이 별로기만 해 봐라, 당장 독설을 날려 주지, 라는 생각을 하며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우물우물, 입을 움직이던 민준의 턱이 절로 벌어졌다.
“이건……?”
세현이 다 안다는 표정으로 “맛있지?” 하고 물었다. 민준이 떨리는 눈으로 데몬을 보았다.
“엄마가 싸 준 김밥이랑 똑같은 맛이야. ……엄마 김밥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거든.”
_162~163쪽
“왜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어? 다른 사람은 다 알고 있었는데, 왜 나한테만 얘길 안 했냐고. 그러다 갑자기 엄마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거기까지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섬광 같은 깨달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화가 난 게 아니다. 무서운 거다. 엄마가 자신을 두고 떠날까 봐 겁이 난 거다. 어느 날 갑자기 돌아오지 않은 아빠처럼.
_182쪽
“그래도 데몬이 우리보다 훨씬 대단해. 우리는 뭐가 되고 싶은지도 모르고 학교에 가라니까 가고, 학원에 가라니까 가는데, 데몬은 벌써부터 인생의 목표가 있잖아.”
“그게 뭐가 대단하냐?”
“너 질투하는 거지? 데몬이 잘생겨서.”
“질투는, 누가!”
민준은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꿱 소리를 질렀다. 세현과 지영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_195쪽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단발머리 여자가 말했다.
“여기 맞아. 까마귀처럼 생긴 앵무새가 있다는 식당.”
“말하는 까마귀 말이지?”
“앵무새일걸? 까마귀가 어떻게 말을 해?”
“그런가? 아, 머리핀 안 가지고 왔다. 나갈 때 꼭 반짝이는 걸 하나 놓고 가야 한다고 하던데. 안 주면 까마귀가 화낸대.”
_202쪽
여자는 까르르 웃으며 흔쾌히 귀걸이를 빼 검은색 벨벳 방석 위에 놓았다. 파주주는 곧바로 귀걸이에 뺨을 비비며 뒹굴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 생각났다는 듯 나가는 여자의 등 뒤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별점이랑 리뷰 잊지 말라고!”
손님 두 명이 나가고, 새로운 손님 두 명이 들어왔다. 데몬은 어느 때보다 씩씩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서 오세요, 악마의 레시피입니다.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_2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