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한 나라의 수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월급쟁이로 순수하게 놀러 다닌 나라가 90여 개국이니 적은 숫자는 아닌 것 같다. 역설적으로 얘기하면 일하면서도 재주껏 땡땡이를 많이 쳤다는 말이 된다. 물론 월급쟁이의 꽉 짜인 시간과 빡빡한 급여라는 한계가 있기에 해외여행에 대한 기대가 있어도 실행에 옮기기는 현실적으로 만만치 않다. 그러나 찾아보면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내 지난 삶이 그걸 증명한다.
언제까지 비용과 시간을 걱정하며 언젠가는 떠나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을 건가. 다람쥐 쳇바퀴 같은 지루한 일상에서 틈날 때마다 관련 서적과 유튜브를 통해 구체적인 여행 계획을 짤 때의 쾌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곳에 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 손과 발로 느꼈을 때의 짜릿함을 상상해보라.
이 책은 여행 안내서가 아니라 여러분을 여행의 매력에 밀어넣어 이번 휴가부터 뒤돌아보지 말고 즉시 떠나라고 꼬시는 책이다. 직장을 그만두거나 은퇴 후 지나온 직장생활을 돌이켜볼 때 후회 없는 삶을 만들기 위해서….
- 6~7쪽, 프롤로그 중에서
원주민인 콜로로족이 ‘모시 오아 툰야’(‘천둥소리가 나는 연기’라는 뜻)로 부르는 빅토리아 폭포는 잠비아와 짐바브웨에 걸쳐 6개가 있는데 짐바브웨에 5개가 있다. 잠비아에는 1개만 있지만, 짐바브웨 폭포를 반대편에서 가까이 볼 수 있는 뷰포인트가 있다. 빅토리아 폭포는 높이 80~108m, 너비 1,701m로 너른 잠베지강에서 현무암 계곡으로 물을 떨구며 폭포를 이룬다. 1855년 영국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발견해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로 명명했다. 최근 짐바브웨와 잠비아 양국이 원래 이름인 ‘모시 오아 툰야’를 찾으려 노력 중이다.
북미의 나이아가라, 남미의 이구아수,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를 세계 3대 폭포라고 한다. 빅토리아 폭포는 낙차가 108m로 높이가 최고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 치는 것 같다.북미의 나이아가라, 남미의 이구아수,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를 세계 3대 폭포라고 한다. 빅토리아 폭포는 낙차가 108m로 높이가 최고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 치는 것 같다. 물안개가 솟구쳐서 구름 기둥을 만든다는데, 어쩐지 물 떨어지는 소리부터 시원치 않고 입구부터 격하게 반긴다는 물보라도 내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수량이 대폭 줄어든 건기에 와서 성난 모습을 보여달라는 것은 억지일까? 10월부터 시작하는 우기처럼 엄청난 수량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보라와 굉음은 없지만 6~7월부터 시작되는 건기에는 수량이 줄어 폭포 안쪽의 절벽을 볼 수 있고 ‘지옥의 수영장’이나 래프팅을 즐길 수 있다.
-38쪽, ‘천둥소리가 나는 연기, 빅토리아 폭포’ 중에서
소금 사막은 소금층이 두껍고 딱딱하다고 아무 곳이나 다니다가는 바닥 밑으로 흐르는 호수에 빠질 수 있다. 넓은 사막이라도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엄연히 따로 있다. 이 길은 전문 운전기사만이 안다. 쉬워 보이는 운전이지만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개인에게 렌터카 사막 투어는 허용하지 않는 것이 국립공원의 방침이다.
사막 가운데 물고기 모양의 잉카와시섬에는 이미 많은 지프가 도착해 이곳저곳에서 연기를 피우며 점심 준비가 한창이다. 성인 남성의 키보다 큰 선인장들이 빽빽한 바위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온통 자갈밭이다. 미끄러워 다리에 힘을 바짝 싣고 조심스럽게 한 발 한발 내디뎌보았다.
입구에서 선인장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배고픔을 참아가며 정상에 올랐다. 평평한 터에는 ‘8월 광장(Plaza 1 de AGOSTO)’이라는 팻말이 꽂혀 있다.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는 곳이지만, 정령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 아닌가 싶다.
사방으로 보이는 것은 눈이 수북이 쌓인 것같이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소금 사막뿐이다. 거기서 반사되는 빛은 매우 강렬해 선글라스를 쓰지 않으면 눈을 뜨기가 쉽지 않다. 동서남북으로 보이는 지평선의 경치에 감탄사만 연발했다.
-54쪽, 여행가들의 버킷리스트 1위,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 사막
하늘에서는 곧 비라도 내릴 듯 구름이 잔뜩 끼었다. 저기압 탓에 공기는 무겁고 바람은 한 점 없다. 하늘을 이고 경사 60도가 넘는 계단을 오르면서 몇 번을 쉬었는지 모르겠다. 정글에 높이 솟은 바위 꼭대기 넓이는 약 2만㎡ 정도 된다. 평평한 마당을 계단식으로 구분해놓았고 왕궁, 정원, 연회장, 테라스터에는 정교하게 쌓은 벽돌담만 남았다.
수영장(저수지)은 길이 90m에 폭 68m, 깊이 7m로 화강암을 파서 물의 누수가 없도록 고안했다. 수영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마련된 왕의 돌의자는 세공을 잘해 반질거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코끼리를 이용한 승강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은 수압을 이용해 바위 아래에서 이 높은 곳까지 공급했다. 동양의 마추픽추라고 불리는 시기리야. 아픈 가족사의 역사 위에 수많은 백성의 피땀, 주검들로 건축된 이 유적이 지금 어렵게 사는 스리랑카인에게 최고 수익원의 관광 자원이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122쪽, ‘하늘에 떠 있는 왕궁, 스리랑카 시기리야 성채’ 중에서
비잔틴 교회 인근의 서쪽 문은 마사다가 로마군 공격에 최초로 무너진 지역이다. 로마군이 공성전을 벌이기 위해 쌓았던 흙 경사로가 아직도 남아 있다. 마사다의 경사 아래로 보이는 로마 진지까지 관광객들이 방문하게 길을 만들었는데 더위에 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냥 그늘을 찾아 얌전히 앉아서 당시 처절했던 전투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로마군에 함락될 것을 예상한 유대 병사들이 자신의 가족을 죽인 뒤 모여서 제비뽑기로 지명된 병사가 동료를 살해하고, 최후로남은 1명이 자결하는 비장한 모습을 그려봤다. 같은 민족이라 공
격하지 않을 것을 예상해 유대 포로에게 경사로를 쌓게 하고, 그 경사로를 이용해 투석기로 성벽을 허문 뒤 의기양양하게 요새에 입성해 시체 960여 기의 영접을 받은 실바 장군과 병사들의 놀란 모습도 떠올려봤다. 세계 전쟁사에서 왜 이 전투를 ‘가장 치욕적인 승리이자 가장 아름다운 패배’라고 부르겠는가.
여러 성인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야만 천국행 열차를 탈 수 있다고 2,000년 동안을 온갖 좋은 말로 꼬드겨도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인명 피해가 크다. 안타까움을 넘어 그만 좀 하라고 울부짖고 싶다.
-180~181쪽, ‘유대 민족 디아스포라의 시작, 이스라엘 마사다’ 중에서
급하게 오른 탓인지 몇 계단 남기고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르는 이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계단 끝자락에서 숨 고르기를 하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툭 친다. 돌아보니 산체스가 일부러 내려와 내 배낭을 들어준단다. 산체스가 오해하지 않게 정중히 거절하고 몇 개 남지 않은 계단을 올랐다.
이곳부터 정상까지는 계단이 아닌 완만한 경사길이다. 일부 젊은이들은 두 발로 서서 걷지만 많은 사람이 바람이 세차서 혹시 넘어져 구를까 싶어 네발로 기어서 조심스럽게 오른다.
분지에 우뚝 솟은 피라미드 정상에서는 수 킬로미터 밖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좋다. 때마침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정상까지 오르며 흘렸던 땀을 식혀줬다. 이곳에서 한눈에 잡히는 도시 규모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테오티우아칸은 계획도시로 바둑판 모양이다. 오른쪽으로는 태양의 피라미드보다 작고 낮은 달의 피라미드가 보인다. 그 옆으로 흰 기둥이 돋보이는 케찰파팔로틀 궁전, 재규어 신전 등 작은 피라미드들이 죽은 자의 길 좌우로 죽 서 있다. 왼쪽으로는 산후안강과 그 너머로 케찰코아틀 신전, 아다스다기단, 거주 단지 등이 보인다. 달의 피라미드 근처 유적보다 상당히 훼손된 것을 멀리서도 알 수 있다.
-235~236쪽, ‘아메리카 대륙 최대의 피라미드, 멕시코 테오티우아칸’ 중에서
추위도 잊을 겸 탁발 거리를 걷다 보니 탁발이 시작되는 왓쌘 수카람 사원에 이르렀다. 환한 조명 탓인지 담장 너머로 보이는 황금색 사원의 화려함이 도드라져 보인다. 이 거리의 탁발은 주민들이 준비한 음식을 나누는 게 아니라 상인이 준비한 음식을 관광객이 사서 스님에게 드리는 방식이다. 정성의 차이는 있지만 참석하는 관광객 면면을 보면 경건한 마음가짐인 걸 느낄 수 있다.
매일 새벽이면 이뤄지는 탁발은 거리를 청소한 뒤 돗자리를 깔고 적당한 간격으로 열을 맞춰 작은 상과 의자를 정렬한 다음 준비한 음식을 놓는다. 탁발 참가자는 신발을 벗고 사롱을 둘러서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다가 스님이 오면 합장한 다음 음식을 스님의 바트(음식을 담기 위해 어깨에 메는 망태기)에 넣으면 된다. 비록 이 탁발은 관광객을 위한 행위이지만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을 위해 사전 준비를 하는 상인의 정성 또한 대단해 보였다.
왓쌘 수카람 사원 어디선가 둔탁한 북소리가 나더니 스님들이 서서히 사원 정문을 빠져나오고 있다. 이 행렬이 정문에서 나오기 무섭게 스님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밀고 소란을 떠는 무례한 관광객이 있었다. 나이 지긋한 여자 보살이 탁발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그 관광객을 제지하며 스님들에게 길을 터준다.
-275쪽, '라오스 불교의 성지 루앙 프라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