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물론은 사소하고 사소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의 길을 제시합니다. -6쪽
데카르트의 영향력은 근대를 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정신을 가진 인간은 능동적인 주체이고, 물질은 수동적인 객체 혹은 죽은 것들이라는 이분법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22쪽
보통 물질 하면 떠올리는, 수동적이고 죽어 있는 것이라는 개념은 데카르트 이후부터 형성되었습니다. 데카르트의 물질관에 영향을 받은 유물론을 ‘생기 잃은 물질’에 관한 이론, 즉 구유물론이라 불러도 좋겠습니다. 반면에 신유물론은 ‘활력 있는 물질’에 관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유물론을 ‘신물질주의’라고도 하는 이유입니다. -24쪽
신유물론자들은 인간이 자신들이 의식해 포착한 물질만을 인정해 왔다고 지적합니다. 그것은 의식에 포착되지 않은 무수한 물질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물질은 외부의 어떤 작용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체로 활력을 가지고 있다고 신유물론자들은 주장합니다. -27쪽
바위와 인간은 서로 다른 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물성은 확장되고 변화하기도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합니다. 바위와 인간인 나는 모두 물질이지만, 같은 경험을 하지는 않습니다. -31쪽
라투르도 근대를 비판합니다. 인간 중심주의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지요. 인간은 순수하게 정신적일 수 없으며, 자연과 분리된 문화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사유는 행위자
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에 담겨 있습니다. -42쪽
근대인은 문명과 질서라는 이름 아래, 이것과 저것을 나눈 후 제거하고 정리하려 했지만,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라투르에 따르면 단 한번도 근대인이 꿈꾼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라투르가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47쪽
라투르에게는 행위자들의 연결망만 있을 뿐입니다. 연결망은 “행위자들이 연합한 효과이지 행위자들이 연합한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 라투르의 주장입니다. 여행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여행 가방과 기차와 지도 등이 연합한 ‘효과’입니다. -50쪽
이제 배제되었던 존재들, 예를 들어 돼지, 병아리, 강 등은 수단이 아닌 행위자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라투르의 행위자 연결망 이론은 비인간 존재들의 목소리를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행위 능력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62쪽
브라이도티는 신유물론적 페미니스트라고 합니다. 남성과 여성,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해체하고 이들 간의 상호 작용 혹은 연결성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인간과 남성의 존엄성과 책임을 보통 강조하는데, 비인간과 여성의 존엄성과 책임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66, 67쪽
브라이도티는 보편적 주체를 거부하는 대신에 유목하는 주체를 받아들입니다. 주체는 더는 확고하게 자신의 위상을 지키고 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변신하는 주체로 인해 나와 너, 주체와 객체 간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다시 말해 유목하는 주체는 보편적인 본질을 품는 변하지 않는 무엇이 아니라, ‘동물‒되기’, ‘타자‒되기’, ‘벌레‒되기’ 등, 경계를 넘나드는 변신하는 존재입니다. -69쪽
불변하는 본질이 없다는 것은 재현을 위한 원본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원본이 없으니 재현이 불가능합니다. 브라이도티는 원본이 없어 재현할 수 없는 상태를 ‘반‒재현주의’라고 말합니다. -80쪽
브라이도티는 여성이 그간의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변화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요. 이것이 브라이도티의 신유물론이 페미니즘과 맞닿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83쪽
브라이도티는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목적과 수단으로 보지 않을 뿐입니다. 즉 인간을 위해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과 기술은 서로 협력하여 새로운 모습을 지닌 존재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87쪽
베넷은 이 지점에서 문제 제기를 합니다. 도구를 생산 수단으로만 삼는 태도는 인간 중심적인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베넷은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난 일원론의 입장에서 인간과 물질의 관계를 이해하는 생기적 유물론vital materialism을 주장합니다. -95쪽
인간이 버린 쓰레기는 매립지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활기 넘치는 화학 물질과 휘발성 강한 메탄 등을 생성합니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이 물질은 스스로 영향력을 미치는 힘을 만들어 냅니다. 베넷이 말하는 생기란 이런 물질의 활력에 관한 것입니다. 전기력도 한 예입니다. 전기의 활력인 것이니까요. -101쪽
사이보그는 인공두뇌를 가진 생명체로, 기계와 유기체가 얽힌 혼종체hybrid입니다. 마치 허구적인 존재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 모두가 사이보그라고 해러웨이는 말합니다. 안경을 쓴 나,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학생, 마이크를 들고 강의하는 교수 등을 떠올려 보세요. 우리는 무수히 많은 사이보그를 만납니다. -117쪽
러므로 우리는 ‘반려종’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개나 고양이 그리고 사람은 이제 식탁에 함께 앉아 식사를 나눕니다. 서로를 응시하며 관심의 대상자로 식탁에 앉게 됩니다. 함께 밥을 먹는 것은 서로에게 감염되는 행위입니다. 이때 개나 고양이는 더는 가축이 아니고,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존재들도 아닙니다. -121쪽
사이보그는 유기체와 무기체인 기계, 물질과 비물질,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부단히 횡단합니다. 〈사이보그 선언〉과《반려종 선언》의 공통점이 이분법을 거부하는 것인데, 신유물론의 ‘새로운 가능성’은 이분법을 해체하면서 열립니다. 즉 새로운 가능성이란 물질의 활력을 인정하는 것뿐 아니라 물질들 간에 무언가 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합니다. -124쪽
실뜨기는 상대가 어떻게 참여하느냐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지고 변형됩니다. 이것이 함께 되기, 공동생성의 존재론적 안무이지요. 해러웨이에게 중요한 건 바로 이런 실뜨기의 얽힘과 그 효과입니다. -127쪽
퇴비가 된다는 것은 공동생성을 위한 과정입니다. 퇴비가 되어 다른 싹을 틔우기 때문입니다. 싹은 자라서 줄기와 잎, 열매를 맺고 이윽고 다시 퇴비가 되는 순환 과정을 겪습니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생명을 우선시하는 것이 아닌 ‘지속’을 우선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진화의 결과물이지, 인간이기 위해 진화를 거쳐 온 것은 아닙니다. -131쪽
인간과 인간의 소통도 어려운데, 인간과 개의 소통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래서 ‘훈련’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지요. 소통한다는 것은 훈련의 과정을 거쳐 서로를 변화시키는 행위입니다. 해러웨이는 이렇게 변경된 형태를 ‘이형변이metaplasm’라고 합니다. 변경 목적이 뚜렷하든 아니든 변경된 모든 경우를 이릅니다. -136쪽
바라드는 자신의 철학을 ‘행위적 실재론’이라고 규정합니다. 행위적 실재론은 간단히 말하면, 행위자는 행위함으로써 실재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행위적 실재론은 ‘실재’, 즉 존재의 ‘행위’와 ‘생성 능력’을 강조합니다. 특히 물질의 능동적인 행위성과, 물질이 의식과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강조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행위성이란 인간의 의도와 상관없이 생성되는 과정입니다. 물질은 고정된 속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변화한다는 것이지요. -141쪽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물이 끓고 있습니다. 보글보글 끓어오른 이 물은 곧 커피잔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물이 보글거리는 것을 얽힘, 끓어오르는 것을 내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라드에겐 현상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존재론적 단위인 것입니다. 내부‒작용을 하는 행위 요소들의 존재론적 분리 불가능성과 얽힘 자체가 바로 현상이지요. -145쪽
바라드는 이론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과학 연구자입니다. 이런 이력이 다른 신유물론자와 다른 점을 만들어 냅니다. 양자물리학의 주요 개념으로 신유물론을 설명하는
것에서 알 수 있지요. 특히 바라드는 물질과 의미의 얽힘을 행위적 실재론으로 제안합니다. -154쪽
회절적 방법론은 작은 차이들에 주목합니다. 특히 ‘얽힘’ 속에 있는 행위성들의 미세한 움직임과 변화를 살펴보고, 윤리적 절단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바라드가 회절적 방법론으로 차이를 드러내는 것에 집중하는 이유는, 차이를 드러낸다는 것은 무엇이 배제되고 제거되는지를 확인시켜 줌으로써 그런 행위에 책임을 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156쪽
바라드에 따르면 타자에게 응답하는 것은 윤리적 문제입니다. 응답한다는 것은 타자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타자는 자아에 대립해서 존재하는 독립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나입니다. 바라드는 자기 몸을 만짐으로써 타자를 경험합니다. 몸은 나와 타자들,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거‒현재‒미래가 얽힌 행위적 실재이며, 윤리와 정치의 근원이 됩니다. 자기‒만짐은 응답의 문제입니다. -159쪽
인간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이 커 인류세라는 말까지 나오는 이 시대에, 신유물론은 자연을 비롯한 물질과 비인간 존재들을 새롭게 바라볼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사회, 문화, 정치 영역으로 확장되어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 중심적인 태도에 대한 일련의 반성과 비인간 존재의 능동성을 인지하게 된 효과라고 하겠습니다. -172쪽
이분법은 주체들끼리 갈등하고 투쟁하게 합니다. 누구나 타자 혹은 객체가 되고 싶지 않아서 상대방이 주체성을 가지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지요. 신유물론은 이런 이분법을 해체하고, 물질의 능동성을 발견함으로써 연대와 협력을 가능하게 합니다. -174쪽
지금 전 세계를 고민에 빠뜨린 기후위기는 우리가 타자임을 부정해 나타난 현상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이고, 물질이고, 타자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페미니즘은 아주 오랫동안 자연, 물질,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유물론은 페미니즘이 확장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174쪽
오랫동안 철학은 이성의 역할과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만 집중했습니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갈등과 위계를 만들어 냈습니다. 신유물론은 이런 철학의 근원적인 문제를 재어쩌면 그것은 존재에 대해 다시 묻는 행위일지 모르겠습니다. -177쪽
신유물론자들이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분명합니다.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겠습니다. 신유물론자들은 첫 번째, 세계를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거부합니다. 두 번째, 실체 개념을 거부합니다. 실체란 변하지 않으며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개체를 의미합니다. 세 번째, 물질은 실체가 아닌 ‘얽힘’의 관계로 생성된다고 봅니다. -179, 1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