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일기」 창작 이전, 청년 루쉰이
메이지 일본에서 읽은 책들
★ 신화사(新华社) 2023년 추천 도서 10선 선정
★ 남방일보(南方日报) 2023년 최고 도서 10선 중 네티즌 평가 1위
★ 신경보(新京报) 2023년 인문사회과학 서적 20선 선정
문단의 ‘권위’ 이전의 루쉰
일본 유학생 저우수런을 만나다
전후(戰後) 일본의 루쉰 연구는 대체로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론’의 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을 매개로 제국 일본을 극복하고자 했던 다케우치는 루쉰의 사상 형성을 베이징 사오싱회관에서 생활하던 시기의 이른바 ‘회심’(回心)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그는 루쉰의 문학은 유학 시절 일본의 문단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루쉰 이전의 루쉰, 즉 저우수런은 1902년 3월부터 일본에서 유학하다가 1909년 8월에 귀국했다. 이는 1881년생인 루쉰이 21살부터 28살까지 7년 남짓한 기간 동안 메이지 시대(1866~1912) 말기를 온몸으로 함께했음을 보여 준다. 이십 대는 지적 독서가 그야말로 집중되는 시기로 이때를 ‘사상’의 기초가 뿌리내리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 해석은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유학 시절의 루쉰에 대해서는 ‘환등기 사건’으로 국민성 문제를 사고하게 되었다는 것을 비롯한 한두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런데 이 책은 도쿄 독일어전수학교에 적을 두고 마루젠서점 2층에서 갓 수입된 서양 서적과 일본의 문인·사상가의 저서와 역서를 읽는 루쉰, 집으로 돌아와 밤새 책을 읽고 나서 그것을 취재원 삼아 중요한 글을 쓰고 동유럽의 소설을 번역한 청년 루쉰, 즉 「광인일기」를 통해 문단의 ‘귄위’가 되기 이전의 저우수런(周樹人)을 그려볼 수 있게 한다.
청년 루쉰의 독서 이력을 통해
메이지 일본을 관통한 서양 사상을 확인하다
일본 불교대학에 재직 중인 중국인 학자 리동무(李冬木)의 논문 11편이 실린 『루쉰을 만든 책들 上』은 ‘루쉰과 일본’ 연구의 집대성이라고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다. 저자는 루쉰이 일본에서 유학한 시기를 ‘저우수런에서 루쉰으로 변신’하기 전 시기로 보고, 그 변신이 메이지 말기 일본의 문단 및 학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근대 초기의 서양 사상이 일본을 거쳐서 중국에 도달했다는 것은 이제 공히 인정되고 있으나 서양 사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본을 거쳤는지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루쉰 역시 일본을 거쳐 서양 사상을 받아들였음을 보여 주는 이 책은 유학 시절 루쉰이 쓴 문장의 ‘취재원’이 된 메이지 일본의 문인·사상가의 저서, 역서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청년 루쉰은 일본인이 쓰거나 번역한 책을 그대로 발췌, 인용, 심지어 ‘도용’하면서 ‘사람 세우기’(立人)와 관련한 초기 산문을 써 내려갔다. 서양 사상이 ‘일본을 거쳐’ 저우수런에게 도달한 것이 분명하다면 작가 루쉰의 탄생과 메이지 말기의 일본은 무관할 수 없다.
필명인 루쉰으로 「광인일기」를 발표하기 이전의 루쉰은 일본 유학 기간에 ‘사람 세우기’ 관련 산문, 「악마파 시의 힘에 대하여」(1907), 「문화편향론」(1908) 등을 쓰고 같이 유학하고 있던 동생 저우쭤런(周作人)과 함께 7개국의 단편 16편을 번역하여 역외소설집(1909)을 출판했다. 지금까지는 이 시기의 성과에 대하여 이미 문단의 ‘권위’가 된 ‘루쉰’으로 저우수런이었던 시기의 루쉰을 해석해 왔다. 즉 그가 일본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누구를 만났으며 어떤 책을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요컨대 저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광인일기」 발표 이후의 루쉰이 아니라 유학 시절의 청년 저우수런으로 되돌아가서 그가 보고 읽고 인용하고 도용한 책들을 검토하고 그가 이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보여 준다. 즉 루쉰이 소장했던 도서 목록과 목록에는 없지만 읽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책을 발굴하여 그것을 당시 루쉰이 쓴 글의 ‘취재원’으로 확정하고 이로써 메이지 일본 문단과의 영향 관계를 살펴본다.
루쉰의 「광인일기」 창작은
메이지 말기 일본 문단과의 조우에 힘입었다!
저자 리둥무는 루쉰이 구체적으로 어떤 독서 과정을 통해서 진화, 개인, 광인이라는 개념을 형성했는가를 보여 준다. 루쉰은 옌푸의 천연론뿐만 아니라 가토 히로유키의 강자의 권력의 경쟁, 오카 아사지로의 진화론 강화를 통해서 ‘진화’ 개념을 받아들였다. 또한 ‘개인’ 개념은 니체와 슈티르너의 원저작보다는 메이지 문단의 구와키 겐요쿠, 다카야마 조규, 도바리 지쿠후, 사이토 신사쿠 등이 해설한 니체와 입센 그리고 게무야마 센타로의 무정부주의자 ‘슈티르너’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구성되어 갔음을 보여 준다.
저우수런이 어떻게 루쉰이 되었는가를 살피는 작업의 최종 목적은 「광인일기」가 어떻게 창작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지나인 기질의 저자 하가 야이치 등의 식인 관련 언설과 그 밖의 광인 언설이 그 창작 배경으로 제시된다. 문학 텍스트로는 지금까지 알려진 고골의 「광인일기」 번역 외에도 마쓰바라 니쥬산카이도의 「광인일기」, 고리키의 「두 광인」, 안드레예프의 붉은 웃음의 일본어 번역 그리고 러시아문학 평론에 열심이었던 노보리 쇼무 등이 루쉰의 광인 이미지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준다.
루쉰이 유학하던 시기의 메이지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한껏 고무되어 국가주의의 광란 속에 빠져들어 있었다. 리둥무는 청년 루쉰이 메이지의 국체를 수용하거나 비판한 일본의 문인 및 사상가의 저술과 평론, 번역 작품을 읽고, 이를 통해 작가 루쉰의 탄생을 가져온 ‘광인’의 추형이 완성되었다고 본다. 다케우치 요시미와 달리 저자는 루쉰이 메이지 말기의 문단과 조우함으로써 「광인일기」의 창작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근대 초기 동아시아의 문학과
근대의 형성을 참고할 만한 좋은 자료
이 책은 근대 초기의 우리 문학을 연구하는 데도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우리의 근대를 일본, 그리고 중국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근대 초기 우리의 문인들 역시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수입된 서양 서적과 일본 책들을 읽은 것은 물론 중국어(한자)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출판된 책들도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이 시도한 것 같은 방법으로 우리 문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책을 읽었는지, 어떤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 연구한 성과는 없는 듯하다. 근대 초기 문인들에 대한 일본 문단의 영향력을 보다 더 강조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본 문단과 언론계가 생산한 출판물을 통해 우리의 근대를 구성하고자 한 것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메이지 일본 문단의 모습을 대단히 구체적으로 그려 준다. 반식민지 중국에서 건너온 유학생 루쉰이 우연히 조우하거나 의식적으로 선택한 모습이다. 메이지 일본의 절대적인 영향력 속에 있으면서도 자신(중국)에게 필요한 개념을 구축하고자 고투했던 루쉰을 통해서 당시 우리는 누가 어떤 책을 읽고 그 책을 통해 어떻게 ‘근대’와 ‘근대문학’을 구성하고자 했는지를 상상하게 하고, 관련 연구 의욕을 촉발시킬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근대의 온갖 문제의 소재, 어쩌면 그것의 근원일지도 모르는 장소에 대해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러자면 우리의 문인들이 어떤 책을 읽고 발췌하고 인용, 도용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고 부정했는지를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저우수런이 읽은 책들을 우리의 문인들도 읽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 문학과 관련한 연구 성과도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외에 한중일 동아시아 근대 초기의 문화, 근대의 형성에 관해 관심이 있는 연구자들에게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그들에게 필요한 메이지 말기의 일본 문단과 언론계 상황에 대한 많은 실증적 자료가 제시되어 있다. 특히 진화론이나 개인주의와 관련하여 당시에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지금은 일본에서조차 거의 잊혀진 인물과 저작들이 생생하게 복원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