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 회원들이 전시에 맞추어 출판한 전시도록은 ‘도록’이라는 출판 문화가 보편화되어 있지 않은 시절에 상당히 새로운 시도였다. 총 4회에 걸친 《AG전》 중에서 1971년 제2회 《AG전》 도록은 국립현대미술관(경복궁)에서 전시 이후 설치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현장감을 최대한 살린 도록이다. 이는 설치미술의 ‘일시성’을 후도록 형식으로 담아낸 최초의 전시 도록이었다. AG 그룹 이전에 한국미술의 실험성과 전위성은 1962년에 결성된 오리진 그룹 및 1967년 《한국청년작가연립전》 등을 통해서 시도되었지만, 비평담론을 중심으로 조금 더 체계적인 시도를 했던 것이 AG 그룹이었다.
─ 8쪽, 〈AG 그룹의 실험미술 전시〉, 정연심
당시에는 한국 화단이 국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실험 미술에의 참여는 반제도적인, 국가 차원의 미술 시스템에 대한 거부를 상징했다. 비평지와 작가들의 작업이 반드시 일치한 것은 아니었으나 전위미술이라는 이름 하에서 작가들은 매체적 확장 못지 않게 새로운 예술의 컨텍스트, 작가적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했다. 당시 국전이나 새로 생긴 국립현대미술관조차도 장르별로 범주화했지만, 이들 “젊은 미술가들”은 전통적인 매체가 아니라 상호 교접하는 매체의 혼종성을 자유롭게 시도했으며, 일상성의 연장선 안에서 미술은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고 있다는, 당시 한국 화단에서는 상당히 낯선 인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 30쪽, 〈AG 그룹의 실험미술 전시〉, 정연심
그러나 어쨌든 예술이 어떠한 강렬한 체험 내지는 필요성이 수반되지 않는 행위를 일삼을 때 그것은 예술에 대한 끈질긴 ‘물음’이라기보다는 찰나적인 자기만족의 행위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가 무목적으로 되풀이될 때 예술은 바로 스스로의 무덤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설사 전위적인 행위에 있어 그것이 만들어 놓은 결과가 문제가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문제라고 할 때에도 그 행위는 어디까지나 미래를 향해 크게 열려있는 것이라야 한다. 모든 창조 행위가 이러한 미래에의 투시일 때에 비로소 창조에 있어서의 모든 자유, 모든 실험은 진정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전위는 전위로서의 한계, 그 다양성과 시한성(時限性)을 뛰어넘어 가장 풍요한 창조의 원천으로서 작용하며 전위미술이 참된 미술의 왕도로 통하는 길이 열리기도 한다. 사실인즉 예술이 새로운 사회구조와 이에 적응되는 기본적 정신 구조의 가장 합당한 표현일 때 그 예술은 새로운 언어의 창조하는 모든 ‘산 예술’로서 공통된 기본 과제를 추구하며 그 과제인즉슨 모든 형태의 전위의 본질을 규정짓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참된 미술은 그것이 전위적인 성격을 띤 것이기에 참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미술이기에 그것은 전위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 91쪽, 〈전위미술론-그 변혁의 양상과 한계에 대한 시론〉 이일
두말할 것도 없이 뛰어난 예술가는 그가 처해 있는 시대 속에 깊은 뿌리를 박고 있다. 또 사실 오늘날에 있어서처럼 미술이 그의 모든 실험과 탐구를 바로 현실과의 ‘치환(置換, transference)’으로 직결시킨 예도 드문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오늘의 미술은 현실 또는 오늘의 시대가 지니는 독자적인 모순, 신화, 부조리 — 그 ‘창조적’ 부조리마저 몸소 노출시킨다. 그리고 새롭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스스로 속에 이 창조적 부조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떠한 새로운 현상, 또는 새로운 작품은 기존의 체계 즉, 역사적인 체계 속에다 위치시키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 새로운 것은 항상 이미 가꾸어진 체계밖에 없거니와 나아가서는 그 체계 자체를 변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94쪽, 〈전환의 윤리-오늘의 미술이 서 있는 곳〉 이일
1970년도는 정치적으로 모든 것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굉장히 가난하던 때였고, 재료도 없었고, 자유로운 표현을 하기 위한 물감이나 모든 것을 구하기 굉장히 힘든 때 였어요. 또 살기가 어려운 때였죠. 그때 미술에서 도전한다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현장을 이용해 새로운 미술을 내놓으니까 —예를 들어서 이강소 같은 경우 닭이 움직인다든가, 신문지를 쌓아 놓는다든가, 통 같은 물건을 그대로 둔다든가, 종이를 내걸고 찢어 놓거나 해서—일반인들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죠. 사람들이 “이게 무슨 미술이냐, 미친 짓 아니냐, 도대체 젊은 애들 이해를 못하겠다”고 했죠. 여태까지 못 보던 것을 보게 된 거니까.
근데 오히려 미쳐야 된다고 봐요, 예술은요. 미친다는 것은 한 번 돌아가서 어떤 도전이라는 것을 실천하면서 남이 안 들어간 경지로 빠져 들어가고 남이 못 하는 것을 해보는 것이죠. 이제껏 없던 것을 우리가 한 번 실현해보겠다는 그 의지가 예술적 정신이라고 저는 보거든요.
─ 188쪽, AG 그룹 작가 인터뷰-서승원
그때 분위기가 상당히 협조적이었고, 동료적이었고, 동료애가 깊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작가들과 다른 여러 작가들과 여러 전시회에서 이렇게 함께 활동하고 있고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당시에 나이에 걸맞지 않는 아주 좋은 조건의 전시장, 전시 조건을 부여받아서 저 스스로 모험적인 작업을 마음껏 할 수 있던 그런 경험은 정말로 쉽게 가질 수 없는 기회죠. 그래서 몇 번의 《AG전》은 상당히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일 교수님이 ‘탈관념의 세계’ ’확장과 환원의 세계’ 이런 식으로 제목을 쓴 것은 당시 작가들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였어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지금이 또 다른 ‘확장과 환원’의 시대가 아닌가 할 정도로, 그룹 활동 자체가 지금도 의미 있는 어떤 활동으로서 저희 내면에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 198쪽, AG 그룹 작가 인터뷰-이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