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35년 11월 15일에 전라북도 순창군 풍산면 죽곡리 160번지에서 삼남 일녀의 셋째로 태어났다. 내가 살던 곳은 안동 김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고 살던 곳이 아랫대실로 불리다가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하죽(下竹)’이란 이름의 부락으로 불렸다.
태어나던 해는 일제강점기로 일본의 강압적인 수탈을 경험했고, 1945년도에는 해방의 기쁨도 맛보았다. 1950년에는 6.25 한국 전쟁도 겪었다. 4.19부터 5.16 등 대한민국의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던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부끄럽지만 나를 포함해 내 나이쯤 되는 사람들은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이라 부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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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영아!!! 학영아!!! 퍼뜩 집으러 가거라.” 동네 어르신들께서 산에서 나뭇가지를 주워 모으고 있던 나를 큰소리로 부르더니, 이내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라는 말씀을 하였다. 급히 찾는 모양새를 보아 아마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서둘러 산에서 내려가 집으로 향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고통스러워하며 신음하고 계신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앓아누우신 아버지를 두고 ‘주장(헛것에 휘둘렸다는 의미)’을 맞은 것이라 수근 거렸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이렇게 된 것이 귀신 때문이라 말하는 사람들의 말에 어머니께서는 굿을 하며 아버지께서 병석에서 일어나길 기원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이리저리 수소문하면서 몸에 좋다는 것을 모조리 구해다가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 애를 쓰셨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의 정성과 가족들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소생하지 못하시고 1944년 음력 11월 22일에 한 많은 오십삼 년의 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당시 나는 국민학교 2학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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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돈 이만 환을 쥐고 바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는 하루 종일 역 대합실에서 기다렸지만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란 걱정이 커지고 두려움으로 무서웠지만 갈 곳도 없었기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늦는 것이라 믿으며 그 추운 날 밤 역 밖에서 또 하염없이 추위에 떨며 기다리다 지쳤고 도저히 추워서 견딜 수 없어 주위를 둘러보다가 야간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몇 명이 모여 있는 역 대합실로 들어갔다. 야간열차를 탈 승객들을 위해 조개탄으로 난로를 때고 있었다. 덕분에 얼어 붙은 몸을 녹일 수 있었지만 야간열차를 타고 모두 떠나고 나만 남게 되자 역무원은 대합실 내 몇 명이 남았나를 확인하고 조개탄을 가져가버렸다. 결국 난로는 꺼져버렸다. 대합실 바닥은 냉기가 올라오고 창문 틈으로 추운 겨울바람이 비집고 들어오니 추위로 덜덜 떨리는 몸은 추위뿐만 아니라 친구의 배신을 깨달으며 더욱 참기 힘든 몸서리까지 쳐지는 것이었다.
76쪽
당시 서울 시내 대학들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이 모여 전학련(전국 대학생 연합회)을 결성했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크게 분노했고 뜻을 같이 하는 많은 학생들이 전학련에 가입해 4.19혁명을 주도하며 이끌었다. 4.19 당시만 하더라도 수많은 학생들이 전학련 소속으로 대의를 위해 싸웠지만 세상도 바뀌고 세월이 흘러 지금은 10명 남짓한 회원들이 과거의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현재 장귀남씨가 전학련의 회장을 맡고 있다. 초대 회장은 11대, 12대 국회의원을 지낸 바 있는 조종익 전의원이다. 그는 19년 넘는 세월 전학련을 이끌며 애를 썼었다. 조의원 이후 약 6년 동안은 내가 전학련의 회장으로 있었고, 뒤를 이어 박철선씨가 약 6년 동안 전학련의 세 번째 회장을 역임했다.
117쪽
1961년도에 5.16 군사혁명이 있은 후 공화당은 정권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했고, 63년도에 5.16을 주도했던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명실상부 공화당이 대한민국의 집권당으로 등극했다. 당시 강 사장은 공화당의 전북도당 경제담당을 맡고 있었는데,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공천을 받기 위해 회사의 돈을 빼내어 공천을 받는 데 필요한 정치자금으로 쓰면서까지 불철주야 애를 썼지만, 최종에는 공천이 무산되면서 무리한 정치자금 조달로 인한 대도실업의 위기를 가져왔다.
그때 강 사장의 정치 바람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각 공사 현장에서 수령된 공사비가 회사 통장으로 입금이 되면, 입금을 확인하자마자 통장에서 돈을 모조리 찾아다가 정치자금으로 끌어다 쓸 정도였다. 매번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다 보니 자재 대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한 것은 물론 직원들의 월급도 제때 지불되지 못했다. 회사가 대내외적으로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강 사장은 끝까지 공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회사는 도저히 버틸 지경이 되지 못했고, 결국 1966년 7월에 대도실업은 부도를 맞았다.
130-131쪽
건설인으로 오십여 년을 산 내게 누군가 건설업만 해온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당연히 No!일 것이다. 딱 한 가지, 가족에게 소홀했다는 아쉬움과 미안함만 빼면 건설인으로 산 세월을 후회하지 않는다. 한 때는 ‘내가 만약 계속 사법시험 공부를 해서 법관이 되었다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예쁘고 착한 손녀딸 태희가 내 꿈을 대신 이루어 주었고 현재 대형 로펌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제주도 항몽유적지처럼 가끔 여행지에서 만나는 내 손길이 닿은 건축물들을 볼 때마다 건설인으로 살길 참 잘했다 싶다. 또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자신의 일에 열중하면서 다른 이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을 수도 있었기에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도 얻을 수 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성공이란 것이 꼭 막대한 부를 얻는 것만은 아니다. 먹고 살만큼의 여유로움과 스스로 자신이 해낸 일에 대한 성취감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공한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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