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28
최흥원은 집을 경영하는 데 안살림을 책임져 줄 아내가 일찍 사망했지만, 재혼하지 않아 애로사항이 많았다. 아내가 사망한 다음 해인 1741년 1월 1일 새해에 가장 먼저 떠오른 심상은 아내 없이 홀아비가 된 자신의 처지였다. 그는 새해를 맞이하니 홀아비의 심정이 즐겁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3월 13일은 둘째 아들의 생일이었는데, 낳은 어미가 있지 않으니 참으로 슬프다고 했다. 아내가 죽은 이후 최흥원의 외롭고 쓸쓸한 심정이 일기 곳곳에 묻어났다
p. 71-73
최흥원은 직접 농사를 관리 감독했다. 농사철에는 파종과 추수로 바빴다. 종들에게 밭에 보리를 파종하도록 했는데, 파종 시기가 늦어 싹이 날까 걱정했고, 해안의 보리타작을 위해 종 10여 명을 보내기도 했으며, 계집종들에게도 모내기, 김매기, 가을걷이, 보리타작 등을 시켰다. 종 상만을 강각동에 보내어 거둔 모초로 재를 만들게 하여 가을갈이에 대비하도록 했다. 매일 밭갈이와 곡식 수확을 점검하느라 바쁘게 쫓아다니니, 그런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한탄스럽기도 했으며, 날마다 생업에 대처하고 힘을 쓰느라 어머니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자신을 탓하기도 했다. 논과 밭이 여러 곳에 있어서 최흥원이 일일이 관리하거나 감독할 수 없었다. 아우를 비롯하여 아들 주진, 사촌 통숙과 문희 등에게 파종과 타작을 감독하게 했고, 그들은 최흥원에게 작업 결과를 보고했다.
p. 127
최흥원은 다시 조선적에게 공부하러 간 아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런데 11월 21일에 주진이 오한과 발열 증세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걱정되었다. 12월 10일에 종이 열 몇 장과 오미자를 아들에게 보냈다. 12월 28일, 아들이 계속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걱정이 멈추질 않았다. 그 사이의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주진은 1738년 10월 1일에 조선적의 집에서 돌아왔다. 아들과의 오랜만의 상봉에 최흥원의 마음은 매우 설렜다. 아들의 모습을 보니 의젓하게 자라서 위로가 되었으나, 학습에는 진전이 없는 듯하여 다소 실망스럽고 답답한 심정이었다.
p. 163-164
1742년 12월 26에는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구하기가 어려워, 어머니의 입에 맞는 것으로 얻은 것이라고는 단지 반쯤 말린 대구와 청어 같은 것뿐이었다. “옛사람들이 어버이를 봉양할 때는 몸을 편히 해 드리고 입에 맞는 것을 모두 갖추어 드렸는데, 나는 이 무슨 성의란 말인가?”라고 하면서 스스로 부끄러워했다. 1744년 4월 27일에도 어머니의 반찬거리가 마땅하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차에 유산의 아내가 꿩 한 마리를 구해 바쳤다. 보리를 주고 사서 병환 중의 어머니에게 올렸다. 최흥원은 어머니 밥상에 올릴 쌀도 광동에 있는 기름진 논에 따로 재배했다. 최흥원은 아내가 없었기 때문에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어머니의 반찬에 더욱 신경을 쓴 부분이 있지만, 아내가 있다 할지라도 어머니의 식사만큼은 정성을 쏟았을 것이다. 최흥원이 효를 실천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p. 182
6월 22일 오전에 관이 마련되었다고 해서 최흥원은 곧바로 염을 하여 부인 묘 옆에다 아들을 묻은 뒤 통곡하고 돌아와 어머니를 뵈었다. 손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비통해하니, 장차 병이 생길 것 같아 걱정되었다. 이 모든 것을 본인이 불효하여 부른 재앙으로 여겼으므로, 죄스러워 눈물만 흘렸다. 6월 26일에 남가(南哥) 아이가 왔기에자식 잃은 슬픔을 말하며 절구 한 수를 짓도록 했다. 그는 곧바로 시를 지어 주었다. 상심해 있는 본인을 위해 어린아이가 지어 준 시를 최흥원은 일기 한편에 적었다. 최흥원은 아내와 어린 자식을 연달아 잃은 아픔을 품고 삶을 견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