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6~17
권상일은 어려서 가학家學으로 학문에 입문하였으며, 당시까지 상주 지역의 학풍을 주도하던 류성룡柳成龍→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으로 이어지는 서애학단의 학문적 풍토 속에서 성장 하였다. 권상일은 7살 때인 1685년(숙종 11)부터 『사략史略』을 시작으로 독서를 하였고, 1691년(숙종 17)에는 사서인 『논어』·『맹자』·『대학大學』·『중용』 등의 읽기를 마쳤다. 권상일은 독서에 더욱 주력하면서 잠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잊고 반복하여 생각하면서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
p.45
면신례와 허참례 등을 마치게 되면서 권상일은 비로소 관원으로 대접을 받으며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권상일이 분관된 승문원은 중국에 보내는 사대문서와 주로 일본에 보내는 교린 문서의 작성을 주관하는 관청이다. 권상일은 허참례를 마친 당일에 숙직하였다. 대개 신입 관원은 주도做度라 하여 20일 동안 숙직을 해야만 했다. 주도는 오랜 기간 직숙直宿해야 하기에 고역일 수 있으나, 관청의 입장에서는 신입 관원이 관청에 적응할 수 있게 하는 과정인 것으로 보인다. 권상일은 주도를 하면서 서리가 전해 준 승문원에 소장된 옛날 사적을 기록한 책을 받아 들고 읽으면서 무료함을 달랬다.
p.70
권상일은 신임옥사가 마무리된 1722년 12월 13일 부망으로 올라갔는데도 병조좌랑(정5품직)에 낙점되었다. 이때의 정사는 소론 세력 이조참의 이명언李明彦이 독정獨政으로 한 것으로, 당시 소론 세력 일부에서 남인 세력을 포섭하려는 움직임의 연장선상에서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즉 소론 세력 내 급소急少 계열인 김일경이 심단沈檀을 중심으로 한 남인 세력을 등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런데 이를 둘러싸고 또다시 대립이 발생했다. 급소 계열의 남인 진용에 대해 완소緩少 계열에서는 부정적이었다. 아마도 이 시기 이명언이 독정으로 권상일을 병조좌랑으로 뽑은 것은 남인 세력과 연대를 시도하는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병조좌랑으로 낙점되었던 권상일은 며칠 뒤에 체차遞差되었다. 당시 마침 칙사勅使가 나오게 되어 있어 이에 대한 준비를 해야 했는데, 권상일은 상경하지 않고 계속 상주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p.141
권상일은 승지로 재직하던 1748년 1월에 치사致仕를 요청하는 상소를 제출하였다. 이때 권상일의 나이가 70세에 이르렀다. 치사란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말하며, 일정한 나이가 되어서 정년으로 관직을 그만두는 경우에도 치사라고 하였다. 대개 70세의 정년이 일반적이었고, 70세가 되어서 관직을 물러나는 경우를 치사로 칭하였다. 70세 치사제도는 1440년(세종 22)에 마련되었다. 단, 모든 관료가 70세가 되면 정년이 되어 일률적으로 관직을 물러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국가의 요긴한 임무를 맡은 자’나 왕의 ‘특지’가 있는 경우에는 치사 되지 않고 계속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권상일도 70세 치사 관행에 따라 상소를 제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