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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는 행위는 사람과 소통하고 친목을 다지는 필수적인 행위이다. 음식을 나누어 먹는 행위의 빈도와 범위를 통해, 참여자가 소속된 공동체 조직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관계로 과거 지방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사는 곳을 표현할 때 ‘향’이라는 문자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도 왕조의 권위가 높아짐에 따라, 율령(律令) 체계가 지방에 전파되었지만, 그와 별개로 ‘향’에서는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공동체 단위의 여러 자치 규약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자치 규약이 율령 체계보다 지방의 현실과 문화를 좀 더 생생하게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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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젊은 문신들 사이에서는 중국어 배우는 것을 그다지 중요치 않게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다. 아마도 중국어 실력이 관리로서의 출세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임금이 몸소 중국어 시험을 보일 때마다 이원익은 언제나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상을 받곤 했다. 그가 중국어를 열심히 배웠던 것이 앞날을 내다보았기 때문일 리는 없다. 그는 약삭빠르지 않은 모범생 타입의 인물이었다. 이원익의 중국어 실력과 인품을 보여 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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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은 안주목사로 임명된 다음 날, 혼자서 말을 타고 임명지로 떠났다. 지방관에 임명된 다음 날 혼자 임명지로 출발하는 것은, 당시 관행에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대개 지
방관에 임명이 되면 한동안 서울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동안에 여기저기 자신의 임명에 관련된 정부 기관들과 유력자들을 공식, 비공식적으로 방문하여 인사를 차리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신임 수령을 모시러 임명지 고을 아전들이 서울에 도착하면, 신임관은 그들과 함께 부임지에 모양 있게 내려갔다. 신임관이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지출했던 것들은 현지에서 온 아전들이 갚아 주었다. 이런 관행은 법은 아니어도 법 이상으로 반복되던 사항이었다. 이원익은 이 모든 과정을 생략했던 것이다. 당사자 개인에게 유리한 관행을 따르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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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로서는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 신망을 얻으며 전쟁영웅으로 떠오른 이순신에 대해 결코 기쁜 마음으로 그 승리를 축하할 수 없었다. 아랫사람의 공이 너무 크면 상을 주기 어려운 법이다. 그 공이 윗사람의 지위와 권위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선조는 먼저 이순신이 임무에 힘쓰는지 물었다. 그러자 이원익은 그가 부지런히 근무할 뿐 아니라 한산도에 군량이 많이 쌓였다고 답했다. 이어 선조는 이순신이 태만해졌다는 여론이 있다면서 이순신의 사람 됨됨이를 추궁하듯 물었다. 이에 이원익은 그가 장수 가운데 가장 쟁쟁한 인물이며 태만한지는 알지 못하겠다고 했다. 선조는 이순신이 군 지휘자로서 자질이 있는
지 다시 물었다. 이원익도 물러나지 않았다. 경상도 주둔 장수들 가운데 이순신이 가장 훌륭하다고 이원익이 말하자 그제야 선조의 물음이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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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원익은 왕이 내려 주는 집을 처음에는 거절했다. 직접 집을 지어 주어야 하는 경기감사 입장에서는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조정에 “나라에서 집을 지어 주는 일로 이원익이 다른 고장으로 옮겨 가겠다고 하므로 명령을 받들어 집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지극히 황공합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인조는 다시 이원익에게 승지를 보냈다. 자신이 집을 지어 주라고 한 것은 그 뜻이 벼슬아치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려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기 뜻을 받아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때서야 이원익은 왕이 지어 준 집을 받았다. 이 집이 현재 광명시 소하동에 있는 관감당(觀感堂)이다. 인조는 집과 더불어 노비도 지급했다.
이에 앞서 이원익이 서울을 떠날 결심을 하고 인조에게 허락을 요청하자, 인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경을 바라보는 것이 어린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를 바라보듯 하오. 이제 경이 떠난다니 나는 어떻게 정치를 하란 말이오?” 인조의 이원익에 대한 마음을 잘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