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윤석을 맞이하러 갔던 우장치가 같이 서울로 올라올 때 동행하면서 전생서제조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알려 주었다. “전생서제조는 공조판서 이문원 대감입니다. 이 대감은 상의원, 선공감, 전생서 등 세 관청의 제조를 겸직으로 맡고 계시니 임금께서 중히 생각하는 사람이지요.” 우장치의 생각은 이문원은 정조가 귀중하게 생각하는 인재이기에 공조판서뿐 아니라 상의원, 선공감, 전생서 등 세 관청의 제조를 맡겼다는 것이었다. 정국이 돌아가는 사정을 깊이는 알 수 없더라도 중앙관청 서리들의 정보망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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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하교에서 언급하고 있던 것처럼 무관, 음관을 막론하고 이서들까지도 당파를 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당파는 학문적인 차이나 학맥을 잇는 데서 그치지 않았고, 정치적 행위는 물론이고 행정적 운용, 경제적 관계 등 조선 사회의 체제 전체가 당색을 빼놓고는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즉 관료들뿐 아니라 그와 유대 관계 혹은 친분 관계를 가졌던 겸인, 그리고 이런 재상가의 겸인들이 경아전으로 근무했던 중앙관청 모두가 각각의 당색이 드러나서, 어떤 관청은 소론, 어떤 관청은 노론 등등의 말이 돌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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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경아전에는 궐원이 자주 생겼고 그런 기회를 통해 겸인이라는 신분을 거쳐 경아전으로 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앞서 황윤석이 근무했던 전생서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생서 아전 중 다수가 판서 홍양호의 겸종이었던 점은 궐원이 생길 때마다 자신의 겸종으로 차출할 수 있는 법 규정 때문에 가능했다. 양란 이후 모자란 중앙관청 이서들을 빨리 충원해서 행정력을 원활히 하려는 의도로 시작된 법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특정 재상, 권력가의 사람으로 여러 관청을 장악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키우고 경제력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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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종부시 근무 때부터 여러 사건에 얽혀 있던 종친가, 재상가의 겸종들이 또 사복시의 서리로 와 있었다는 사실은 그 겸종들이 각 관청에서 사건을 일으켜서 쫓겨나도 다른 관청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주공의 권세와 영향력으로 가능했고, 그 겸종들은 마치 호가호위를 하는 것처럼 특권을 누렸다. 반면 이들을 상대하고 중앙관청의 행정업무를 끌어가야 했던 실무급 관직자들은 상급자인 제조와 이들의 겸인 서리들 중간에서 처신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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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인 개개인은 주공가의 권력 부침에 따라 불안정한 신분이었고, 어떤 당파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서도 겸인들의 위치는 불안했다. 하지만 겸인 신분은 자의적인 선택이었고, 주공가와의 결별, 혹은 다른 주공의 겸인으로 옮기는 것 또한 겸인의 선택이었다. 불안정한 상황의 대비책으로 경아전 자리의 유지 전략은 치열했다. 더 풍족하고 권력 있는 관청의 서리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주공을 동원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모함이나 사기, 위조 등 각종 비법을 동원하여 쫓아낸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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