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학문은 처음에는 사장詞章을 섭렵하고, 이어서 주자의 글을 두루 읽고 순서에 따라 사물의 이치를 궁구했어도 도리어 물리物理와 내 마음[吾心]이 끝내 둘로 갈라져서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없었다. 이에 오랫동안 불교와 도교에 드나들었다. 급기야 오랑캐 땅에 살면서 곤경에 처하여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격을 강인하게 함에 이르러서야 성인이 이런 상황에 처하신다면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까를 생각하였다. 홀연히 격물치지의 취지를 깨달았으니, 성인의 도는 내 본성으로 충분하기에 밖에서 구할 필요가 없었다. 선생의 학문은 무릇 세 번 변해서야 비로소 그 도에 들어가는 문을 얻었던 것이다.
이 뒤로는 지엽을 다 버리고 한결같이 본원에 뜻을 두어 묵좌하여 마음을 맑게 하는 것[黙坐澄心]을 배움의 요체로 삼았다. _22면
정명도는 말했다. “내 학문은 비록 전수받은 바가 있지만, 천리 두 글자는 도리어 내가 체인體認해 낸 것이다.” 양지가 바로 천리요, 체인이란 실제로 자기에게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_80면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강구하지 않겠는가? 다만 하나의 요령이 있으니, 오직 이 마음이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데 나아가 강구할 뿐이다. 예를 들어 겨울에 따뜻하게 해 드릴 것을 강구하는 경우에도 단지 이 마음의 효도를 다하고 조금의 인욕이라도 끼어들어 뒤섞일까 두려워해야 하며, 여름에 시원하게 해 드릴 것을 강구하는 경우에도 단지 이 마음의 효도를 다하고 조금의 인욕이라도 끼어들어 뒤섞일까 두려워해야 한다. 단지 이 마음을 강구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마음이 만약 인욕이 없는 순수한 천리라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데 성실한 마음이라면, 겨울에는 자연히 부모의 추위를 생각하여 저절로 따뜻하게 해 드릴 도리를 구하고자 할 것이며, 여름에는 자연히 부모의 더위를 생각하여 저절로 시원하게 해 드릴 도리를 구하고자 할 것이다. 나무에 비유하면 진실로 효성스러운 이 마음은 뿌리이고 수많은 조목들은 가지나 잎이다. 반드시 먼저 뿌리가 있은 뒤에 가지나 잎이 있는 것이지, 먼저 가지나 잎을 찾은 뒤에 뿌리를 심는 것이 아니다. _87면
선생[丈]께서는 “지금 마음을 논하는 사람들은 용龍을 가지고 논해야지 거울[境]을 가지고 논해서는 안 된다. 물도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건대, 물과 거울로 (마음을) 비유하는 것이 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물과 거울은) 감정을 개입하지 않고 비추니 그것은 외물에 따라서 그 모습을 드러내 주고, 반응하면 모두 실하고, 지나가면 (흔적을) 남겨두지 않습니다. (외물이) 스스로 아름답고 스스로 추하며, 스스로 가고 스스로 오지만 물과 거울은 거기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대개 자연이 하는 바에는 언제나 욕심이 없습니다. _30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