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나의 삶이 오로지 내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누군가의 삶을 책임지고 있고 동시에 다른 삶에 내가 빚지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렇게 나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떤 일들이 있었다'고 말하고 그 발생과 변화에 관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은 곧 나의 변화를 의미한다. 앞서 '그것들'을 통해 문학 비평의 문을 열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차원에서 나는 여전히 개인의 경험에 갇혀 있었다. 이후 비평의 방식을 통해서 변화한 것은, 나를 사유하고 감각할 때에도 개인성에 국한되지 않(못하)는 지점과 그 연원을 질문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무엇인가를 비평할 때는 분명한 관점과 태도가 요구되기도 하지만 분명함이란 자기를 거듭 단속하는 와중에 유연한 변화를 수긍하는 데에서 지속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내 삶 속에서 문학 비평은 자기 목소리를 지키면서도 또 다른 자기를 무시하지 않는 것, 매 순간 타자의 세계를 탐문하고 함께 살기를 다짐하는 일이 되었다.
'책머리에'에서
지금 여기서, 모든 시는 서정시라는 전언을 되새겨본다. 시를 지배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시인의 정서가 아닐 수 없고, 시의 화자는 시인 자신이 아니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혹여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는 순간에도 시인은 시를 짓는 이가 '나'라는 자명한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한 편의 시가 누군가에게 읽힐 때만큼은 시인의 존재는 장막에 가려진다. 누구도 시 속의 '나'를 시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여기서, 장막에 비치는 그림자를 주목해보려 한다. 그 그림자는 무엇보다도 시의 무대에 등장한 화자의 존재를 의심하게 한다. 다시 말해, 이 의심은 시인이 어떤 의도로 화자를 시의 표면에 내세운 것인가이다.
시를 짓고, '나'는 산다 — 신해욱과 김언의 시
이쯤에서 다시 확인하고 싶은 것은 이런 문학의 기능이다. 한 편의 소설을 구성하는 수백 개의 문장 가운데 절묘한 하나가 우리 삶의 한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고, 그 때문에 소설은 하나의 사건을 다루는 경우에도 수백 가지 인간의 삶의 장면을 상상하고 그 각각에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경험의 대입이 동원된다. 문학이 공론장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이처럼 한 편의 작품이 그 속에서 내가 수많은 삶을 살아보는 경험을 통과해서 나로 다시 돌아오는 경험이 가능하도록 씌어졌기 때문이다. 한 편의 소설을 하나의 강력한 주제에 동원되어 해석될 때, 공론장으로서의 문학은 납작하게 접혀서 또 다른 공론장에 끼워 넣을 만한 책갈피가 될 뿐이다.
현실과 문학의 현실 — 문학이 공론장에서 활용되는 방식들
개인들이 '우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모두에게 심장이 있기 때문이다. 한 계절이 가도록 누군가의 얼굴을 그리워해보고, 새벽 내내 편지를 적어 본 적이 있는 자라면, 또한 마음을 놓듯 누군가의 얼굴과 이름 앞에 흰 국화를 두고 온 적이 있는 자라면 이 시의 도입부에서부터 반복해서 말하는 “우리의 심장을 풀어”라는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경험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 단단하게 맺힌 것이 풀어져, 흰 눈처럼 쏟아지고, 그다음에는 푸른 새싹을 틔울 수 있기를 기원했던 마음들이 이 긴 시를 이루는 짧은 구절과 구절, 그 사이에 풀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탄생할 것인가 — 이원론
이수명의 시는, 사랑에 관한 것이든 사물에 관한 것이든, 가장 평범해짐으로써 가장 특별해진다. 이때 평범함이란 비범함을 간직한 평범함이다. 모든 것의 표본이 될 만한 것으로서의 평범함은 얼굴과 팔 다리가 없는 몸통[torso]처럼 사실적이면서도 현실의 문법에서 어긋나 있는 존재의 방식이다. 이 시는 그러한 존재의 방식을, 거두절미하고 보여줌으로써, 현실에 놓여 있는 시의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목격되는지를 스케치한다.
아름답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 이수명론
“여름이니까 그럴 수 있다. 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 이처럼 애매하고도 그럴듯한 말을 통해 문제의 외연이 갖고 있던 심각성이 벗겨지고 그것이 내포하고 있던 낯선 기운이 소설의 전면에 만연하게 되는 것이다. 그 낯선 기운이란 이를테면 각자가 체험으로 획득한 삶의 속성이기도 하다. 매 순간 누구나 저마다의 편견으로 세상을 보고 있지만, 또 다른 순간 저와 다른 입장에 동화됨으로써 놀랍게도 누구의 것도 아닌 하나의 마음을 만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떤 윤리적인 당위나 논리적인 설득도 해내지 못하는 그 완전한 동감은 소설 속의 한 문장처럼 사소하고도 개별적인 마주침으로서 전체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구원하며 구원되는 실감 — 김애란, 「물속 골리앗」
소설 속 '나'는 거듭 철학적인 사유로 빠져들려는 찰나의 자신을 거짓말과 농담으로 잡아챈다. 말하는 나와 그런 나를 부정하는 또 다른 나의 만남은 '거짓말이다'와 '농담이었다'라는 자기부정의 진술 속에서 발견된다. 이 자기부정은 결국 소설을 쓰는 자신과 소설 속에 나타나는 자신의 모습의 불화에서 비롯되기도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온전히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자기 말의 한계를 인식한 나는 나를 부정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긍정하게 된다. 나의 죽음으로써 나의 삶을 계속하는 것이다.
죽음과 얼음 — 『연대기』에 이르는 한유주 소설의 연대기
몸의 다른 부분들과 비교해보아도 손만큼 의미심장한 것은 없어 보인다. 하물며 몸에 관련된 대부분의 비유들은 중의를 가질 수밖에 없다. 가령 '손을 씻는다'는 말에는 팔목에 달린 손가락과 손바닥의 부분을 씻는다는 의미에 더불어 어떤 관계를 끊는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손이 의미 있는 이유는 하나가 다른 하나와 포개져서 온기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신체 부위이기 때문이 아닐까.
속수무책(束手無策),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시의 화자는 “너”라는 대상을 호명하면서, 그리고 너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 혹은 “얼룩진 얼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범박하게 말하면 그 얼굴은 시인의 얼굴이다. 시를 짓는 시인 자신의 얼굴은 일면 “거울” 속에서 발견되는 상인 동시에, 시에 들어 있는 대상의 얼굴이기도 하다. 가령 달을 시의 대상으로 삼았을 경우에 화자에게 자신의 얼굴은 그 달이 된다. 또한 달 속에서 발견되는 얼룩들이 얼굴이 된다. 시인은 시를 통해서,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는 자이다.
얼굴도 이름도 없이